2007년 02월 01일
종합과 분석의 방법
간단히 말하면, 방법의 관점에서 종합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묶어서 (전체로) 보는 것을 말하고, 분석이란 하나의 것(전체)을 부분으로 작게 쪼개어 각각을 고찰해 봄을 말한다. 분석과 종합의 엄밀한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것은 칸트였는데, 예를 들면 종합명제란 상호 외적인 개념들 사이에 관계를 지어 만든 명제이고, 분석명제란 어떤 개념 내에 이미 포함된 개념을 뽑아내 만든 명제이다(따라서 종합명제란 그 참 거짓이 경험에 달려 있는 명제이고, 분석명제란 주어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어 경험과 무관하게 참인 명제이다). 그러므로, 종합이 1) 큰 틀에서, 총체적/전체적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관점을 취하고 2) 그것은 서로 무관하거나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서로 ‘연관’ 짓는 방법이라면, 분석이란 ㄱ) 부분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관점을 취하고 ㄴ) 서로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서로 다른 것들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방법론으로부터 나오는 독창적 업적의 성격도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종합적 방법/접근법을 선택한 경우에는 많은 자료 수집과 더불어, 자료들간의 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밝히고 그것들을 함께 묶는 데서 독창성이 나올 수 있으며, 분석적 방법/접근법을 선택한 경우에는 자료의 수집보다는 기존에 동일한 것들로 묶여진 자료들을 엄밀히 세분하는 데서 독창성이 나올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각각 종합과 분석의 방법에 있어서 최선과 진부한 또는 최악의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최선의 분석적 태도는 ‘차이’에 민감하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같거나 동일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포착한다. 이러한 차이의 포착은 이론을 정교화하고 엄밀화하면서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기존에 간과되었던 메커니즘 등을 발견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 있어서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은 자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한편 최선의 종합적 태도는 ‘연관성’ 또는 ‘관계’에 민감하다. 즉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관계 없거나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 연관성이나 공통된 어떤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전체 맥락 속에 위치시켜 총체적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를 설정할 수 있게 해주고 새로운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분류법/체계=세계관’에 도달할 수도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자본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해 단순히 생산수단, 화폐 등의 사물로 보는 분석적 접근법은 자본이 사실은 사회관계 속에 위치한 것이라는 것을 감추지만, 만약 자본을 다른 것, 특히 노동력과의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자본의 운동, 축적과정을 인과적,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최선의 분석과 종합의 방법이야 말로 최선의 독창성에 이르는 방법이다.
반면 진부한/최악의 분석적 방법은 단지 기존의 전형적 분류체계에 따라, 전체를 부분으로 나눈다. 그 결과 기존의 분류체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는다. 즉 진부한 분석은 특정 분류체계 내에서 동일하게 보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파악하지 못한다. 대신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거나 저거나 다 같은 것으로 보는 비엄밀성만이 판치게 된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매우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런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분석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이와 연관되어 진부한/최악의 종합적 방법은 단지 하나의 사전에 미리 취한 관점을 가지고 통념상 비슷해 보이거나 동일해 보이는 것들을 서로 연관 짓거나 묶는 것에 그친다. 즉 진부한 종합은 주어진 전형적인 분류체계 내에서 다르고 서로 무관하게 보이던 것들을 서로 연관 짓지 못한다. 이러한 종합 방법 역시 매우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런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종합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익히 알려진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혹은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거친 구별을 습관적으로 적용해 모든 철학을 평가하려는 것과 같은 태도, 플라톤 이후로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다는 식의 오만 등이 그러한 진부한 종합과 분석법을 예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진부한 분석과 종합은 결국 기존의 통념적 분류체계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것에 맞추어 모든 것을 나누고 연관을 지으며, 결국 그것에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문은 하나의 제의/의식ritual이 된다.
세부적인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과학도들은 분석, 즉 차이를 포착하는데 능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자료를 많이 모으는 인문학도들은 종합, 즉 공통된 본질을 포착하는데 능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의 능력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두 가지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더욱 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일급의 학자란, 서로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엄밀히 구별해 내는 능력과 서로 다르고 무관하게 보이는 것들을 연관해 생각해 낼 줄 아는 능력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현실을 면밀히 살피면서 ‘정말 그것들은 서로 같은(또는 연관된) 것들인가, 정말 그것들은 서로 다른(또는 무관한) 것들인가’를 계속 자기 자신에게 골치 아프게 묻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종래 가지고 있는 통념에 대해 성찰적으로 도전해야 하므로, 진정한 학문의 길이란 자신의 정신적 평온을 해치는 괴로운 길이 되기 쉽다. 그래서 천재들이란 불행한 게 아닐까?
초고: 2006.4.17
퇴고: 2007.1.23/28/31, 2.1
덧.
이제 우리는 각각 종합과 분석의 방법에 있어서 최선과 진부한 또는 최악의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최선의 분석적 태도는 ‘차이’에 민감하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같거나 동일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포착한다. 이러한 차이의 포착은 이론을 정교화하고 엄밀화하면서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기존에 간과되었던 메커니즘 등을 발견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 있어서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은 자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한편 최선의 종합적 태도는 ‘연관성’ 또는 ‘관계’에 민감하다. 즉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관계 없거나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 연관성이나 공통된 어떤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전체 맥락 속에 위치시켜 총체적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를 설정할 수 있게 해주고 새로운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분류법/체계=세계관’에 도달할 수도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자본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해 단순히 생산수단, 화폐 등의 사물로 보는 분석적 접근법은 자본이 사실은 사회관계 속에 위치한 것이라는 것을 감추지만, 만약 자본을 다른 것, 특히 노동력과의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자본의 운동, 축적과정을 인과적,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최선의 분석과 종합의 방법이야 말로 최선의 독창성에 이르는 방법이다.
반면 진부한/최악의 분석적 방법은 단지 기존의 전형적 분류체계에 따라, 전체를 부분으로 나눈다. 그 결과 기존의 분류체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는다. 즉 진부한 분석은 특정 분류체계 내에서 동일하게 보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파악하지 못한다. 대신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거나 저거나 다 같은 것으로 보는 비엄밀성만이 판치게 된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매우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런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분석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이와 연관되어 진부한/최악의 종합적 방법은 단지 하나의 사전에 미리 취한 관점을 가지고 통념상 비슷해 보이거나 동일해 보이는 것들을 서로 연관 짓거나 묶는 것에 그친다. 즉 진부한 종합은 주어진 전형적인 분류체계 내에서 다르고 서로 무관하게 보이던 것들을 서로 연관 짓지 못한다. 이러한 종합 방법 역시 매우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런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종합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익히 알려진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혹은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거친 구별을 습관적으로 적용해 모든 철학을 평가하려는 것과 같은 태도, 플라톤 이후로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다는 식의 오만 등이 그러한 진부한 종합과 분석법을 예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진부한 분석과 종합은 결국 기존의 통념적 분류체계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것에 맞추어 모든 것을 나누고 연관을 지으며, 결국 그것에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문은 하나의 제의/의식ritual이 된다.
세부적인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과학도들은 분석, 즉 차이를 포착하는데 능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자료를 많이 모으는 인문학도들은 종합, 즉 공통된 본질을 포착하는데 능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의 능력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두 가지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더욱 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일급의 학자란, 서로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엄밀히 구별해 내는 능력과 서로 다르고 무관하게 보이는 것들을 연관해 생각해 낼 줄 아는 능력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현실을 면밀히 살피면서 ‘정말 그것들은 서로 같은(또는 연관된) 것들인가, 정말 그것들은 서로 다른(또는 무관한) 것들인가’를 계속 자기 자신에게 골치 아프게 묻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종래 가지고 있는 통념에 대해 성찰적으로 도전해야 하므로, 진정한 학문의 길이란 자신의 정신적 평온을 해치는 괴로운 길이 되기 쉽다. 그래서 천재들이란 불행한 게 아닐까?
초고: 2006.4.17
퇴고: 2007.1.23/28/31, 2.1
덧.
# by | 2007/02/01 16:52 | 실험실 | 트랙백 | 덧글(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