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과 분석의 방법

간단히 말하면, 방법의 관점에서 종합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묶어서 (전체로) 보는 것을 말하고, 분석이란 하나의 것(전체)을 부분으로 작게 쪼개어 각각을 고찰해 봄을 말한다. 분석과 종합의 엄밀한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것은 칸트였는데, 예를 들면 종합명제란 상호 외적인 개념들 사이에 관계를 지어 만든 명제이고, 분석명제란 어떤 개념 내에 이미 포함된 개념을 뽑아내 만든 명제이다(따라서 종합명제란 그 참 거짓이 경험에 달려 있는 명제이고, 분석명제란 주어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어 경험과 무관하게 참인 명제이다). 그러므로, 종합이 1) 큰 틀에서, 총체적/전체적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관점을 취하고 2) 그것은 서로 무관하거나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서로 ‘연관’ 짓는 방법이라면, 분석이란 ㄱ) 부분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관점을 취하고 ㄴ) 서로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서로 다른 것들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방법론으로부터 나오는 독창적 업적의 성격도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종합적 방법/접근법을 선택한 경우에는 많은 자료 수집과 더불어, 자료들간의 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밝히고 그것들을 함께 묶는 데서 독창성이 나올 수 있으며, 분석적 방법/접근법을 선택한 경우에는 자료의 수집보다는 기존에 동일한 것들로 묶여진 자료들을 엄밀히 세분하는 데서 독창성이 나올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각각 종합과 분석의 방법에 있어서 최선과 진부한 또는 최악의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최선의 분석적 태도는 ‘차이’에 민감하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같거나 동일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포착한다. 이러한 차이의 포착은 이론을 정교화하고 엄밀화하면서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기존에 간과되었던 메커니즘 등을 발견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 있어서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은 자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한편 최선의 종합적 태도는 ‘연관성’ 또는 ‘관계’에 민감하다. 즉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관계 없거나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 연관성이나 공통된 어떤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전체 맥락 속에 위치시켜 총체적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를 설정할 수 있게 해주고 새로운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분류법/체계=세계관’에 도달할 수도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자본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해 단순히 생산수단, 화폐 등의 사물로 보는 분석적 접근법은 자본이 사실은 사회관계 속에 위치한 것이라는 것을 감추지만, 만약 자본을 다른 것, 특히 노동력과의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자본의 운동, 축적과정을 인과적,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최선의 분석과 종합의 방법이야 말로 최선의 독창성에 이르는 방법이다.

반면 진부한/최악의 분석적 방법은 단지 기존의 전형적 분류체계에 따라, 전체를 부분으로 나눈다. 그 결과 기존의 분류체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는다. 즉 진부한 분석은 특정 분류체계 내에서 동일하게 보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파악하지 못한다. 대신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거나 저거나 다 같은 것으로 보는 비엄밀성만이 판치게 된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매우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런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분석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반면 이와 연관되어 진부한/최악의 종합적 방법은 단지 하나의 사전에 미리 취한 관점을 가지고 통념상 비슷해 보이거나 동일해 보이는 것들을 서로 연관 짓거나 묶는 것에 그친다. 즉 진부한 종합은 주어진 전형적인 분류체계 내에서 다르고 서로 무관하게 보이던 것들을 서로 연관 짓지 못한다. 이러한 종합 방법 역시 매우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런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종합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익히 알려진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혹은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거친 구별을 습관적으로 적용해 모든 철학을 평가하려는 것과 같은 태도, 플라톤 이후로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다는 식의 오만 등이 그러한 진부한 종합과 분석법을 예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진부한 분석과 종합은 결국 기존의 통념적 분류체계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것에 맞추어 모든 것을 나누고 연관을 지으며, 결국 그것에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문은 하나의 제의/의식ritual이 된다.

세부적인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과학도들은 분석, 즉 차이를 포착하는데 능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자료를 많이 모으는 인문학도들은 종합, 즉 공통된 본질을 포착하는데 능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의 능력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두 가지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더욱 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일급의 학자란, 서로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엄밀히 구별해 내는 능력과 서로 다르고 무관하게 보이는 것들을 연관해 생각해 낼 줄 아는 능력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현실을 면밀히 살피면서 ‘정말 그것들은 서로 같은(또는 연관된) 것들인가, 정말 그것들은 서로 다른(또는 무관한) 것들인가’를 계속 자기 자신에게 골치 아프게 묻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종래 가지고 있는 통념에 대해 성찰적으로 도전해야 하므로, 진정한 학문의 길이란 자신의 정신적 평온을 해치는 괴로운 길이 되기 쉽다. 그래서 천재들이란 불행한 게 아닐까?


초고: 2006.4.17
퇴고: 2007.1.23/28/31, 2.1

덧.

by pepe | 2007/02/01 16:52 | 실험실 | 트랙백 | 덧글(7)

2006년 내 이글루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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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참으로 저조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by pepe | 2006/12/30 13:32 | 트랙백 | 덧글(0)

구조와 행위의 문제

1. 관계로서의 구조

구조란 그 말의 원 뜻에서처럼 무엇보다도 하나의 관계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 관계는 대단히 견고하여 (일련의 재구조화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거치지 않는한) 바뀌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관계란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부분들 사이에 일정한 상호작용의 패턴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정한 상호작용의 패턴이 필연적이거나, 내적인 경우를 좁은 의미에서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자본-노동, 선생-학생, 부모-자식 등 서로 간에 상대를 서로 함의하는, 즉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천적 종합명제(synthetic a priori)로서의 관계). 한편 부분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거나 내적이지 않더라도 일정한 상호작용의 패턴(예: 학력-출세/승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까지 합해서 우리는 넓은 의미의 구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 즉 부분들간의 견고하고 일정하고, 비교적 규칙적이며 안정화된 상호작용 패턴은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사회적 통합과 시스템 통합의 비유가 적절한 설명이 되겠다. 사회적 통합이란 사회적 행위자들이 어떤 합리성, 근거, 동기를 가지고 행위가 조정되고 그에 따라 그들 사이에 일정한 행위 패턴이 생기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적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위 패턴이 어떤 강제적 압력에 의해서 유지되게 됨을 의미한다. 물론 순수하게 합리적이거나, 강제적인 경우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은 오로지 분석적인 구분일 뿐이다. 왜냐하면 합리성이란 언제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의 계산과 사고를 전제하는 것이며, 강제적인 것도 사회적 행위자가 자신의 소멸을 감수할 정도로 저항한다면 결국 효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사회구조를 사회적 행위자들의 사회적 합리성과 그리고 강제성=체계성의 총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사회의 위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는데, 분석적으로 볼 때 이 위기 경향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강제적 압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행위자의 의식적 노력이나 의지 또는 무지, 무의식에 의해서 그것을 고려하고, 이용하거나, 그것에 부합하는 합리성이 부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의 선생-학생의 관계는 서로간의 존중과 인정이라는 합리성 외에도 공식적인 제도(졸업제도, 시험, 성적 등)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약 서로간의 존중/인정이라는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아서 학생이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선생이 학생을 학생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식제도가 작동한다면 그것을 우리는 학교제도 또는 교육구조의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정반대로 우리는 행위자의 합리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강제적/체계적 압력이나 힘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교수를 학생들이 여전히 교수로 인정하지만, 공식적으로 그가 교수로서의 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 이 특정한 학생-교수의 관계는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두 가지 다 부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구조란 거의 껍데기일 따름일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우리는 구조라는 것이 행위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왜냐하면 행위자의 행위 없이 구조는 부재하거나 최소한 위기에 빠진다). 다시 말해 구조와 행위는 서로 자율적이지만 동시에 긴밀히 연결도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2. 법칙으로서의 구조

구조라는 것이 행위자나 사회부분간의 일정한 행위패턴을 가리키기 때문에, 사회과학내에는 마치 그것이 하나의 법칙, 규칙인 것처럼 ‘구조’와 ‘법칙’이라는 말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엄밀히 구별해야 한다. 그것은 법칙이라는 말이 가지는 복잡성 때문이다.

우리가 법칙을 항상 언제나 관철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행위자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구조와 행위의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법칙이 관철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회적 행위의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양자택일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구조주의자는 행위자는 역사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에는 구조만이 전부라는 사회실재론 또는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택하게 될 것이고, 반면 개인주의자는 구조란 이름에 불과하고, 개인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 뿐이라는 사회명목론 또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택하게 된다. 설사 우리가 구조란 개인을 형성시키는 것이고 개인들의 행위가 구조를 형성시키는 것이라고, 듣기 좋게 변증법적인 개념화를 하게 되더라도 불분명한 부분은 분명히 남아 있다. 긴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즉 통시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 서로 마주친 구조(분명히 일정의 자연적 필연성과 법칙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되는)와 개인(분명히 나름의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의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사회적 법칙의 특성을 잘못 파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회적 법칙은 자연 법칙도 그러한 것처럼 언제 어느 때나 관철되는 그러한 특성이 아니다. 법칙이란 언제 어느 곳에서나 관철(실제로 발생)이 되고, 따라서 그렇게 언제 어디서라도 관철이 안 되는 경우는 법칙이 아니라는 것은, 법칙을 경험의 반복에 따른 습관의 결과로 파악하는 흄(Hume)적인 경험론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법칙이란 심지어 자연 법칙조차도 그것이 항상 작용은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실제로 경험될 수 있게끔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반작용하는 힘이나 법칙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물체가 중력에 끌려 낙하한다는 법칙은 날아가는 비행기에 항상 작용은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구조, 즉 사회적 상호작용의 패턴으로부터 하나의 법칙을 도출해낼 때 우리는 그것이 현실에서 반드시 관철된다고 볼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연과학처럼 선천적 종합명제적 특성을 가진, 즉 필연적이고 내적인 관계로서의 구조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법칙이란 언제 어디서나 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기 보다는 작용하는 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사회구조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며 그것에 따라서 인간이 그 사회구조의 강압적 힘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압적 힘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지 또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강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힘을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고유하게 행동할 수 있다(해석학적 측면 – 그 힘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그는 그 힘을 오히려 이용해 자신의 목적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그 힘에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순응하거나, 그것을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저항할 수도 있다.

요약하면, 사회법칙을 이해할 때 그것이 항상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면, 우리는 사회구조가 갖는 힘이 작용하는 환경하에서, 행위자가 그 법칙(규칙)을 어떻게 따르고, 어떻게 대응(대항)하고,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우리는 그것을 행위자의 전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법칙이란 항상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경향적으로, 그러한 행위들의 결과로서만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사회구조 법칙과 사회현상 일반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법칙은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것일 수는 있다. 둘째,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발생하지는 않는다. 셋째, 오히려 그것이 실재하는 세계에서 발현되고 작동되는 것은 언제나 인간에 의해 매개될 때이다. 넷째, 인간은 그 법칙 또는 구조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창의적으로 행동하며,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을 이용하며 심지어는 저항(이 경우 그 법칙을 억누르는 다른 법칙을 이용할 수도 있다—이 세계의 구조는 일괴암적인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경쟁적이고 심지어는 상쇄적인 법칙들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까지 하게 된다(물론 여기에는 행위자가 위치한 맥락과 그가 의존하는 전략적 계산양식의 문화적, 사회적 특수성이 개입된다). 다섯째, 따라서 우리가 ‘하나의’ 사회 법칙 혹은 구조를 이해할 때 그것이 단지 사회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행위들의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환경, 장,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여기서 이해사회학 혹은 해석학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 물론 이쪽으로 너무 경도되면 모든 구조와 법칙을 무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학이 된다). 중요한 것은 법칙 하나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 구체적인 행위 수준에서든, 또는 그것을 규율하는 또 다른 법칙 수준에서든) 어떻게 조합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여섯째, 따라서 그러한 법칙이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법칙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법칙이 관철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동시에 (항상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사회적 법칙/구조의 존재와, 사회적 행위가 그것으로부터 가지는 자율성(법칙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러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양 작동하는—왜냐하면 그 법칙이 작용은 하지만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 다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로서 법칙적, 필연적 구조와 자율적 행위의 문제는 해결된다.

최초: 2004.1.10
수정: 2005.7.27
축약: 2006.12.12


더 읽을거리: 비판적 실재론과 전략관계적 접근법

by pepe | 2006/12/12 20:37 | 실험실 | 트랙백(2)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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