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공상과학이고, 현실은 베버? 봉준호의 <기생충> 실험실

마르크스는 공상과학이고, 현실은 베버? 봉준호의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동시에 유머와 서스펜스가 넘치는 영화였다. 하지만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기도 했다. 아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한 것이다. 사실 간단한 내용인데 쓰다보니 계속 뭐가 덧붙여지고 길어져서 재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가급적 읽지 마시라. 리뷰는 <기생충>, <설국열차>, <위대한 개츠비> 스포일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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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계급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설국열차>에서는 명확히 (포스트-)마르크스적 스탠스를 취했다. 단지 계급 상승이 아니라 진정한 혁명, 자본주의 계급 구조의 파괴와 그로부터의 탈주를 그렸던 것이다. 멈추어서는 안되는 열차의 엔진은 너무나 명확하게 자본주의를 상징했고, 열차 앞칸은 1세계, 포드주의, 지배이데올로기, 타락한 상류계급을 보여주었다. 단지 열차의 주인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계급 불평등의 구조는 계속되니까. 그러므로 엔진 자체를 파괴해야 했다, 그리고 열차 밖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마지막 생존자 중에 백인 남성은 없었다. 황인 여성과 흑인 남성만 있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인에게 있어 진정한 명화란 특별히 비평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메시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작품이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 일치하는 경험을 제공할 때 비평이라는 소화제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내게 그러한 요건을 100% 충족시킨 영화였다. 그래서 내게 봉준호 감독 최고의 영화는 <설국열차>이다.

그런데 <기생충> <설국열차>보다 명확하고, 약간의 해석이 필요하다(그래서 그렇게명징하게직조되어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설국열차>보다는 못한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설국열차> 마르크스적 계급 스토리는 베버적 계급 스토리로 바뀌었다. 어떤 이들은 부르디외나 베블렌을 거명할지도 모르나 나는 베버의 계층론 안에 부르디외나 베블렌이 말하는 문화적 계급투쟁이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계급은 가족을 단위로 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계급 스토리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계급 스토리가 아니다. <설국열차>에서 계급은 가족을 넘어선 집단의 스토리였다. 반면에 <기생충>에서 계급은 가족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명백히 계급을 하나의 통일된(또는 통일될 있고 그래야만 하는) 사회 집단으로 보지만 베버는 명백히 계급을 통일된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계급이란 경제적 위치일 뿐이고 반드시 어떤 집단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은 비슷한 정도의 명예와 생활양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생충> 김기택(송강호), 박동익(이선균), 그리고 가사도우미 국문광네, 이렇게 가족의 이야기이고, 경제적으로는 같은 계급인 (속임수, 사기를 통해) 기생하는 가족이 일차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한다(가족단위 서사는 개인주의 서사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경향은 ()자유주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 가족 사이에는 같은 계급의식은 커녕 똑같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연대의식도 전혀 없다. 그러기는 커녕 살기위해 서로 살인 폭력을 행사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제 이건 클리셰가 되어버린 같다, 그렇지 않나?). 경제적인 위치가 비슷하다는 외에는 유사한 점이라고는 없는 하층계급은 분열되어 있는데, 반대로 상류계급은 문화를 매개로 집단으로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동익(이선균) 가족이 즉흥적으로 마련한, 막내 아들 박다송의 생일 번개에 초대한, 역시 상류층일 (또는 베버식으로 표현하면 비슷한 생활양식과 명예를 공유하는) 지인들은 영화 대사에도 나오듯이 처음부터 준비되었던 것처럼 너무나 서로 유기적으로 어울린다.

더구나 <설국열차>의 하층민들이 노동계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한 유추가 가능했다면, 김기택(송강호) 가족은 명백히 노동계급은 아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 보기도 어렵다. 그보다는 몰락한 중산층이다. 영화가 계급에 관한 것이라면, <,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백수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몰락한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이 등장한 것은 무엇을 뜻할까? 신자유주의 이후의 중산층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보다 설득력 있고 공감을 받을 있는 계급을 설정한 것일 있다. 어떻든 한국과 같이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역사가 길지 않고, 자영업자가 많은데다가, 특히 IMF 위기 이후 부도, 폐업, 실직이 일상화된 곳에서 중산층 정체성이 남아 있는 하층계급이나 몰락한 중산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몰락한 중산층이 반지하에 사는 일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잠깐 일했던 마케팅리서치 회사에서 소비자 인터뷰를 자택 방문에서 적이 있다. 집은 반지하가 아니라 그냥 지하에 살았다. 나야 당시만 해도 무늬만 사회학도이지 사회경험이란게 별로 없어서 전혀 못느꼈는데 같이 갔던 부장님께서 집은 지하에 살지만 아주머니 말씀하시는 것부터 수준이 있어 보인다, 망한지 얼마 안된 것처럼 집에 있는 가전제품의 급이 매우 높다, 최근에 뭐가 못되었나 보다, 안타깝다, 라는 얘기를 했고, 그제서야 뒤늦게 나도 그렇구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도 아주 잠깐 구반포의 강남 신도시에 살다가, 후로 반지하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몰락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영화 처음에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 처럼 보이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내용이 궁금하면 면대면으로 물어보시라). 몰락한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모든걸 포기하고 마침내 공장까지 가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또는 김기택(송강호) 가족처럼 공장조차도 없는일할 있는 아들과 딸도 둘다 백수이다그래서 기생의 유혹을 느낄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생충> 계급 구도는 결코 마르크스적인 이분법적인 자본-노동의 대립이 아니다. 첫째, 경제적 격차나 불평등을 보여주는 자체가 마르크스적인 것은 아니다. 베버적 시각도 충분히 그러한 구도를 보여줄 있다. 베버는 계급을 시장에서의 경제적 위치, 또는 소유와 소득 기회를 포함한 삶에서의 기회의 차이로 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폭우에 완전히 잠긴 반지하와 폭우에도 멀쩡한 미제 인디안 텐트를 정원에 저택의 차이는 계급이란 삶의 기회에서의 차이라는 베버의 계급 정의에 부합한다. 하지만 베버적 계급 구도에서 착취는 없으며, 계급은 능력과 자원에 따른 서열이나 불평등일 뿐이다. 기생충에서 김기택(송강호) 집과 박동익(이선균) 집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대립할 일은 없었다. 관계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의 착취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위로의 기생만 보일 뿐이다. 오히려 경제적 갈등은 사이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저택에 기생하는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다. 박동익(이션균)네가 운전기상와 가사도우미를 해고한 것도 결국에는 김기택(송강호)네가 꾸민 일이다. 사실 어쩌면 진정한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영화의 포커스는 여기가 아니라 반지하와 저택 사이의 대조, 그리고 문화적 갈등에 놓여져 있다.

물론 <기생충>에서 경제적 차이가 삶의 기회와 생활의 차이를 낳는 것은 너무나 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베버적인 계급 묘사일 뿐이다. 사실 부분은 계급간의 삶의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는 3세계 주변부와 서구 중심부를 대조하는 것으로 보일 같기도 하다(결말에서는 저택이 유럽계 백인에게 넘어간 것을 보라). 서구에서 이런 침수 장면은 허리케인으로 침수된 미국을 제외한다면 주로 3세계 자연재해에 관한 보도에서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감정이입 없이 아주 안전한 곳에서, 전후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는 이른바자연재해 포르노라고나 할까. 내게는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임팩트가 있었고 아마도 칸에서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그러므로 <기생충> 계급 갈등은 자본-노동이 아니라 상류층과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몰락한 중산층 백수 집안 사이의 갈등이다. 반지하와 대저택의 물질적,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사이의 갈등은 상징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베버에 따르면 갈등은 경제적 차원보다는 문화적 차원, 베버가 신분status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차이에서 일어난다. 명예와 생활양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른 서로간의 멸시와 질시에서 일어난다(부르디외는 이를구별짓기라고 불렀다). 베버의 용어를 따르자면 <기생충> 그리는 것은 계급갈등이라기 보다는 신분 갈등이다. 그러나 이것도 계층갈등임에는 분명하고, 계급이라는 개념이 베버가 정의하는대로 경제적인 것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최근의 사회학에서는 문화적 영역에서의 계층갈등을 계급갈등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이것도 계급갈등이라고 하자. 물론 신분갈등이든 문화적 갈등이든 이렇게 계급 갈등을 그리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갈등은 상징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경제보다 그게 훨씬 중요한 이슈일 있다. 더구나 마르크스의 시대와 달리 신중간계급이 형성되고 나중에는 조직화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유연 축적체제로 전환되면서 계급의 구성과 갈등은 다차원적으로 변화하였다. 김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이기에 어느 정도의 문화적 소양 (또는 부르디외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문화자본) 있다. 어느 정도의 교양, 그리고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국내외 명문대생 연기를 감쪽같이 있다. 베테랑 운전기사 역할도, 그리고 교양있는 가사도우미 역할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중상층으로서의 자존감 또한 약간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선을 넘는 ”, 상징적 위계에 도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게다가반지하의육화된 냄새는 어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냄새 자체가 아니라 냄새가 난다는 지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다. 아마 김기택(송강호) 본래 하층계급이었다면 그러한 멸시가 기분 나쁘긴 하지만 익숙해져 그냥 참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몰락한 중산층이었으므로 멸시를 끝내 견디지 못한 같다.

그래서 <기생충> 그리는 불평등은 경제적일지라도, 그것이 그리는 계급 갈등은 경제적 갈등이 아니라 상징적, 문화적 갈등이다. 영화 속에서 박동익(이선균) 가족은 악덕 자본가도 아니고 때로 역겹고 타락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특별히 위선적이지도 않으며, 가정교사,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를 특별히 착취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보기에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을 다소 불결하게 본다 또는 멸시한다, 그리고 조금 잘난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도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자본주의에서의 불평등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본가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없다. 그리고 그냥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과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기택(송강호) 뜬금 없이 오근세한테서 냄새난다는 (실제로 영화 속의 상황에서 악취가 났을 것이다) 마디에 뚜껑이 열려 박동익(이선균) 죽인다. 정작 기택(송강호) 가족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아들을 거의 죽일 뻔하고 딸을 끝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오근세( 가사도우미의 남편)인데 말이다. 기생이라는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하층 계급내 폭력이 갑자기 상징적, 문화적 갈등에 의해 촉발된, 계급간 폭력이 되어버린다.

김기택(송강호) 갑자기 오근세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거나 박동익(이선균)에게 적대감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둔감해선지는 몰라도 그럴 정도로 김기택(송강호) 박동익(이선균) 은근한 차별적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모멸감을 느꼈는지 드러나지 않는 같다.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재산을 다 날려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일까? 체육관 대피소의 너무나 평온한 모습은 충격을 애써 감춘 것이었을까? 아무튼 아무리 적대감이 생겼다고 해도, 겨우 마디 정도로 사람이 죽고 하나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야 하는가? 혹시 김기택(송강호) 가족이 과거에 멸시가 섞인 한마디에 풍비박산났던 것이라면 이러한 결말이 이해가 수도 있겠지만, 영화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는 없다. 혹시 다른 계급에 대한 멸시는 무엇이라도 정도의 죄악이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는가? 아니면 하층계급의 분노가 이렇게 크고 예측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도 갑작스레 당할 있으니 자본가 계급은 조심하라는 것인가—“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또는 결국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계급내 갈등이 아니라 계급간 투쟁이라는 것인가? 어떻든 영화는 김기택(송강호) 그래야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심리적, 사회적 설명이나, 그러한 행동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비판 없이 그냥 다짜고짜 (자본가이긴 하나 딱히 자본가로서 그려진 것도 아닌) 상류층 남자를 죽여버리고 살인자는 지하로 숨어 버린다.

이것은 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같다. 박동익(이선균) 죽음은 별로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쁘지는 않지만 불평등 위계에서 강자이기 때문에 죽어도 별로 동정할 만한 부분이 없게 느껴진다. 반면에 그가 짓지도 않은 죗값을 대신 치러버리는 바람에 비극을 초래한 다른 비극은 가려진다. 뭔가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국문광, 오근세의 죽음은 임팩트가 별로 없고 동정심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김기택(송강호) 가족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것은 딸 기정, 즉 여성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지하에 갇힌 아버지, 그리고 그를 구하겠다는 아들이라는 서사에 의해 가려진다. 더구나 앞서 말했지만 비극의 원인 또한 은폐된다. 영화에서 본래 비극은 사실 김기택(송강호)네와 가사도우미 가족의 갈등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초래한 것은 경쟁적으로 기생하지 않으면 없게 그네들의 형편, 그리고 그런 형편을 만들어낸,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것은 모두 박동익(이선균) 가족하고는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이다(차라리 이들을 정말 악랄하게 그렸다면…). 특히 후자는 영화에서 일부 묘사되고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비극의 궁극적 원인은 설명되지 않고 은폐된다. 따라서 영화는명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관객에게 위험한 메시지를 있다. 자본가는 무조건 나쁘다거나 (하지만 개인과 구조는 구별해야 한다), 노동계급이나 하층계급은 정말로 불결하다거나 위험하다거나, 자신의 책임은 외면하고 욕망에 가득차 있다거나 등등.

이러한 결말은 F. Scott Fitzgerald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결말과 비교될 있다. <위대한 개츠비> 어떻게 보면 한편으로는 개천용(?)—이번에는 몰락한 중산층이 아니라 아마도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놀라운 계층 상승에 성공한 개츠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수저 데이지와 남편 뷰캐넌 사이에 있는 문화적 계급 갈등으로 읽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게 되면 은폐 되는 것은 <기생충> 유사하게 -데이지 뷰캐넌 가족과 톰의 정부 머틀 윌슨, 그리고 톰의 자동차를 정비해주는 정비소 주인 조지 윌슨의 관계이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 <기생충>보다 위대한 것은 개츠비의 욕망이 김기택의 욕망보다 순수하다거나, 개츠비의 범죄가 김기택의 범죄보다 가볍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 결말에서 유한계급 톰과 데이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개츠비를 죽이는데 있다. 톰은 자본주의적 착취exploitation 아니지만 명백히 머틀을 성적으로 착취(이용)하고, 그리고 그의 남편도 정신적, 경제적으로 착취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연적 개츠비를 죽이는데 이용한다. 개츠비를 죽이고 조지는 자살한다. 결국 유한계급 자본가들이 사회의 하층계급을 이용하고 파멸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이 부주의careless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선”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도리어 개츠비는 위대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 이제 고전이 되었고 이러한 계급 스토리는 클리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클리셰를 탈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이 자본가를 죽이게 하고, 2명이나 죽인 살인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대신 지하에 갇혀 죄값을 치르게 한다고 해서 특별한 카타르시스가 생기는 같지도 않다. 오히려 관객은 이유는 명확히 없지만 김기택(송강호)네를 동정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기생충> 어쩌면 관객이 주인공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인식하고 거리를 두게 만드는 소격효과를 의도했으나 실제로는 관객이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게 만든 브레히트의 실패한 서사극에 비견될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기생충>에서 김기우(아들) 아버지 김기택(송강호) 구하기 위해 부자가 것을 결심한다. <설국열차>에서 그려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구조의 파괴와 혁명은 영화장르가 공상과학이었으니 가능했던 셈이다. 한국적 현실을 배경으로 블랙코미디-스릴러에서는 개별적으로 부자가 되는 외에는 탈출구가 없다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탈출구도 아니다. 베버는 탈출구가 없는 이러한 현실, “the tremendous cosmos of the modern economic order”철장(iron cage)” 비유했다. 김기우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고 현실은 여전한 반지하 집이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계획이 있든 없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하실 바깥을 향한 모르스 부호 신호는 허망하고 부질없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설국열차>에서도, <기생충>에서도남궁씨들은 계급갈등과 비극의 현장을 떠나려고 한다. 전자에는 떠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후자에서는 실제로 떠나버렸다. 성공한 건축가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떠나 버렸으나, 반대로 김기우는 성공해도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꿈을 꾸는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 지금의 현실에 탈출구는 없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울하게 봉준호 감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 <설국열차>, <옥자>에서 봉준호는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남겼지만, <기생충> 그러한 희망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살인의 추억>으로 회귀한 것일까? 그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라고 해도 나는 그를 비난할 없을 같다. 누가 그러한 희망을 쉽게 말할 있겠는가. 그러나 봉준호에게 황금종려상을 영화제는 비난할 있을 같다. 하층계급의 행태와 분노를 무섭지만 기괴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계급 상승을 수는 있어도 계급 불평등의 구조 자체는 어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영화를 보고 안도한 것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주형 / 경남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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