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 "에릭 홉스봄의 생애" 실험기자재

에릭 홉스봄의 생애(The Life of the Party)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번역: 지주형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
by Eric Hobsbawm
Allen Lane, London, 2002. xv + 447 pp., [16] p. of plates
ISBN 0713995815


한국어판: 

<미완의 시대>, 이희재 옮김 (민음사, 2007)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5688



<흥미로운 시대(Interesting Times)> 는 자서전 제목치고는 기묘하게도 빈약한 제목이다. 마치 노움 촘스키(Noam Chomsky)가 “미국이 더 잘할 수 있었을까”라는 제목의 글을 쓴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제목은 불길한 중국의 경구처럼 폐부를 찌르고 있다—아이러니칼한 영국식의 과소평가로서.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은 말한다. “나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특별하고도 끔찍한 세기의 대부분을 견뎌왔다”라고. 그러나 그는 그 세기의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중의 한명으로서 그 세기를 견뎌왔고 그러한 역사가의 냉정한 시선은 책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다. 베에토벤 서거 100주년을 경축하는 학교 행사를 기억하는 남자로부터 그가 살아온 역사를 듣는다는 것은 마치 교황으로부터 종교적 의무사항을 지시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홉스봄도 그의 교황인 스탈린에게 시선을 돌린 적은 있다. 비록 그들이 만났을 때 그 독재자는 명백히 시체가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자서전들처럼 이 책도 에릭 홉스봄이 살고 있는 영국에서 선전할 것이다—그건 영국인들이 맑스주의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괴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뮤엘 존슨 박사로부터 윈스턴 처칠까지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들은 특이한 인물들이지 고루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다. 이것이 그들이 괴짜와 귀족을 사랑하는 이유이고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는 이 두 가지 모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이 귀족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들이 귀족들에게 비겁하도록 공손해서 뿐만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살벌하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귀족들이야 말로 관습을 가장 잘 무시하는 이들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서전이란 은근히 반(反)지적인 장르로서, 톨스토이가 플라톤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보다 아침식사로 무엇을 먹었나에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모순적인 것이기도 하다. 자서전들은 개인 생애의 유별남을 포착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똑같은 낡은 얘기를 하게 된다. 누구든 태어나야 하고 부모가 있어야 하고,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성을 발견해야 하고, 경력을 쌓아야 하고 등등. 전기(biography)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생물학(biology)이다. 그리고 생물학은 개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또한 자서전은 겸손한 것에도 우호적이지 않다. 아무리 자서전 작가가 겸손하더라도—홉스봄은 매력적이게도 그러하다—자서전에 그려진 사건들이 중요한 까닭은 단순히 그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벗기 힘들다.

그렇다면 인생담이란 지식인에게 가장 적합한 형식은 아닐 것이다–전기가 사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그들의 매혹적인 삶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저작들을 제외한다고 했을 때 다윈의 생애만큼 재미없는 삶을 발견할 수 없다. 홉스봄과 같은 영국 지식인에게 있어서는, 영국인들이 사상만큼이나 참회 또한 싫어한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비록 수줍어하고 과묵한 영혼들이기는 하지만, 영국인들은 홉스봄이 “이불 속을 들추는 전기”라고 부르는 것을 그다지 생산하지 않으며, 이 책도 침대 시트 한 장 잡아 당기지 않고 있다. 홉스봄은 철저히 그의 사적인 삶을 감추고 있기에,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다면 대실패가 될 것이다. 그는 런던에서도 런던탑(Tower of London)에서 태어난 진짜 런던 토박이 여인과 짧은 기간동안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슬쩍 언급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적 진기함의 측면에서 서술된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그의 부모 둘 다 그가 매우 어렸을 때 죽었고 숙모와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히 이후의 그의 삶에 깊은 정서적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대신 그는 전기라는 장르의 황금률을 깨고 술이나 여자에 대한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및 사상이라는 맥락 속에 그의 개인적 삶을 위치시킨다.

사상에 관한한,  20세기 영국은 그 큰 부분을 홉스봄 자신과 같은 유태계의 중부유럽 이민들로부터 수입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나미어(Namier), 아이센크(Eysenck), 포퍼(Popper),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들 명석한 불청객들과 뜨내기들이 없었다면 현대 영국 문화는 네안데르탈인의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매우 동일한 일이 발생했다. “영국” 문학의 정상은 한명의 폴란드인(조셉 콘라드 Joseph Conrad), 세 명의 미국인(헨리 제임스 Henry James, T.S. 엘리어트 T.S. Eliot,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과 다섯 명의 아일랜드인(쇼 Shaw, 와일드 Wilde, 예이츠 Yeats, 조이스 Joyce, 베켓 Beckett)에 의해 독점되어졌다. 아일랜드인들은 대영제국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그 댓가로 오랫동안 영국에 지대, 소, 병사들을 제공할 뿐 아니라 영문학의 대부분을 쓰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주장했듯이 이러한 유럽인 망명자들의 위치는 애매하였다. 서너개의 다른 문화들을 뒤섞은 그들은 영국인의 편협성을 부끄럽게 하는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그들 대부분이 유럽 중심부의 정치적 폭정과 분쟁으로부터 피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작들에는 본토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열정과 절박함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대개 그들이 외국에서부터 힘겹게 오르고 있는 구명보트를 흔들지 않는다. 그들은 본토 문화의 지루함을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이러한 애매한 위치는 이 회고록에 의해 잘 예시되고 있다. 86년전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양있는 오스트리아인 어머니와 런던의 노동계급 집안 자식의 아들로 태어난 홉스봄은 비엔나에서 자라났고 히틀러가 제국의회를 장악하는 와중에 고등학생으로서 베를린으로 이주하였으며, 1933년에는 런던으로 피하였다. 그곳에서 놀랍게도 그는 겨우 2년후에 케임브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그 이후로 쭉 그는 런던에서 살면서 일해 왔다. 그는 영국 신민으로서 잉글랜드에 왔기 때문에 자신이 피난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젊었을 적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만큼의 돈을 간직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그리고 아직도 절대적으로 어디서든지 이방인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세계시민이다. 그의 부모는 이에 걸맞는 국제주의적 상징성을 가지고 당시 레닌(Lenin), 제임스 조이스, 다다이스트(Dadaist)들이 거주하고 있던 쮜리히에서 결혼하였었다. 

비엔나와 베를린에서는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영국인, 영국에서는 유태계 이민, 그리고 공산주의자중에서는 고집불통 이단아였던 홉스봄에겐 현재 하이드파크(Hyde Park)만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라틴아메리카도 고향 같다. 반세기 이상 그는 산티아고에서 서울까지 지구를 돌면서 어눌한 말로 가르치고 논쟁하고, 조사하고, 친구를 사귀어 왔다. 그는 쿠바의 혁명가들과 칠레의 소설가들, 뉴욕의 재즈 연주자들, 샌프란시스코의 보헤미안들과 리마로부터 뮈조레까지 뻗쳐있는 지구라는 지적인 마을을 방랑하였다. 그에게 있어 미국을 방문하는 일은 라파즈에 들리거나 하바나에서 체 게바라의 비공식 통역자로 활동하는 것만큼 언제나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미국 정부는 그가 미국에 강의하러 갈 때마다 특별 비자에 지원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이 영국 공산당에 극히 짧은 기간동안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년간 미국에 갈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그는 JFK공항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30년대의 한 번뜩이는 장면을 통해, 홉스봄은 피난민들과 저항운동 투사, 유고슬라비아 빨치산과 수용소 생존자들, 미심쩍은 시인들과 비밀요원, 그리고 용기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더러운 배반자들의 베를린 뒷방들에서의 월경(越境)을 목적으로 한 회합을 이 책에서 그리고 있다. 그가 결코 시오니스트가 아니었고 “인종적 근거에서 나에게 연대책임 질 것을 요구하는, 작고 군국주의적이고 문화적으로 실망스럽고 정치적으로 공격적인 민족국가”에 대한 한치의 감정적 밀착도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 세대의 해방된 중산층 비엔나 유태인이 대부분 그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 안에 모든 종류의 종족적 특수주의(ethnic particularism)에 대한 깊은 반감을 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성, 소수민족 등과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역사서술에 대해 불편해 하고, 제3세계의 혁명적 민족주의에 대한 악명 높도록 부정적인 평가--가끔은 불쾌하도록 치켜세웠다가 조롱하는(de haut en bas) 식의--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그에게 있어 민족주의란 히틀러를 의미하지 호치민을 의미하지 않았다. 

홉스봄은 베를린에서 고등학생으로 공산주의 조직에 처음 가담하고 나중에는 케임브리지의 대학생으로 공산당에 얽히게 된, 평생에 걸친 공산주의자였다. 종종 대영제국의 한 결과로서, 소련 첩자인 킴 필비(Kim Philby)로부터 타리크 알리(Tariq Ali)와 페리 앤더슨까지, 영국의 꽤 많은 좌파 정치운동가들은 세계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홉스봄은 케임브리지의 악명높은 영국인 소련 첩자 몇을 알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말하길, 제안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그도 첩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영국정보부의 일원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결여하고 있었는데 그 조건이란 초자연적인 속도로 런던 타임즈에 실린 십자말 풀이를 풀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른 많은 이민자 동료들과 다르게, 그리고 그의 무궁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그는, 고상한 억양과 더불어 본토인들의 보수적 정치를 수용하는, 영국인보다 더 영국적이 되는 국외추방자의 거룩한 게임에 빠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다른 이들이 진저리가 나서 탈당한 후에도 오랫동안 고집세게 공산당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영국 공산주의자였다. 영국 공산주의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귀족원(상원)만큼이나 체제의 일부이다. 이것이 이 세계시민의 좀더 재미없는, 전통주의적인 측면이다. 홉스봄의 시대엔, 주요한 영국 공산주의자들의 상당수는 변증법에 대한 관심과 빅토리아시대 골동품 수집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가지는 학자티를 내는 귀족적인 인물들이었다. 홉스봄이 한 때 한 중국 게릴라 지도자를 아테네움(Atheneum)이라는 런던에서 가장 숨막히는 상류사회 클럽에서 만났다는 것은 전적으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이 회고록에서 “공식적인 영국 기성 문화의 용인된 구성원”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비록 그가 현재처럼 매우 건강한 삶을 적절히 즐기고 있다고 해도 그는 또한 분명히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 오게 된 사람의 즐거움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사실상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런던 문예 집단의 정회원인 것을,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전통 하에 있는, 후기 블룸스버리 그룹류의 지식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는 결코 정치 활동가가 아니었고, 기질적으로 책과 새들에 좀더 집착하였다고 고백한다. 그가 속했던 선구적인 ‘공산주의 역사가 그룹’의 몇몇 회원들처럼 그도 문학예술에 대한 관심을 통해 역사학에 이르게 되었고 그것은 그의 산문의 멋지면서도 정제된 우아함에서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EP 톰슨 또한 처음에는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문학하는 이들은 대개는 팜플렛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길 갈망하면서 침대 밖으로 나오는 타입이 아니다. 사실, 홉스봄이 헝가리와 프라하의 봄 이후에도 시대착오적으로 공산당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던 한 가지 이유가 적어도 그 때쯤에는 그에겐 그것이 펍에서 꾸물거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데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홉스봄은 노엘 아난(Noel Annan), 메이너드 케인즈(Maynard Keynes), EM 포스터(E.M. Forster)가 있던 전성기의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컬리지에 입학했으며 그곳 생활을 분명히 즐겼다. 그는 실제로 포스터를 레니 브루스(Lenny Bruce)의 공연에 데려갔는데, 그 만남의 내용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하는 것일 것이다. 학부생중에는 여전히 다윈(Darwin), 리카르도(Ricardo), 헉슬리(Huxley), 스트라치(Strachey)와 같은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비록 거만한 사립학교가 아니라 특이하게도 비천한 고등학교(grammar school)출신이었지만, 홉스봄은, 테니슨(Tennyson), 러셀, 비트겐슈타인을 자신들의 선구자들로서 세는 사도 클럽(Apostles' Club)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유태계 이민 좌파 홉스봄이 케임브리지에 전적으로 매혹된 것은 아니었다. 펜으로 멋지게 그려낸 당시 킹스컬리지 학장의 작은 초상을 통해 그는 가식적이고 노망된 자비의 가면 뒤에 있는 악의와 심술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영국 중상층계급에 합류한 상태였고, 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사람들 앞에서 결코 불쾌감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홉스봄이 1930년대에 가입한 공산당은 만약 중앙위원회가 지시하면 배우자를 포기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집단이었다. 실제로, 잠재적인 당원 후보가 아닌 어떤 이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홉스봄은 그가 더 이상 순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감정은 오늘날 회귀하는 모르몬교도나 회개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노동계급 전투성에 대한 야비한 배반의 기록으로 점철된 스탈린주의 정당에 속해 있는 것을 별로 꺼림칙해 하지도 않았지만, 처음부터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상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적 세대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비록 열린 태도를 가지긴 했지만, 그도 1968년으로 인해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 대부분의 반동적인 낡은 금권 정당들보다 청년 하위문화를 조금 더 동정하게 하였던 것은 재즈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 그는 10년간 신정치인지(The New Statesman)의 재즈 평론가였는데, 1930년대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재즈 트럼펫주자인 프랭키 뉴턴에 대한 오마주로서, 프란시스 뉴턴이라는 가명으로 글을 썼다. 당원으로 남아있는 것은 10월 혁명과 파시즘에 대한 투쟁의 기억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경할만한 감정은 결코 공산당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사실 매우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10월 혁명의 이름으로 공산당에 대항해 싸웠었다.

홉스봄은 무엇보다도, 심지어는 1980년대까지조차도 인민전선주의자였다 그는 노동당의 “극”좌파들에 대항하고 자유당과의 반대처주의 연합을 구성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히틀러의 발흥을 관통해 살아 온 사람으로서는 놀랍게도 그는 대처리즘(Thatcherism)에 의한 노동당의 선거 패배가 “나의 정치적 경험중에서 가장 슬프고도 절망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노동당을 정치적 우파로 돌리려는 그의 노력(가장 큰 임무라고 하기는 어려운)이 그가 혐오하는 바로 그 블레어주의(Blairism)—그가 “바지를 입은 대처리즘”이라고 부르는—를 마침내 결과했다는 것을 언급하진 않는다.

홉스봄은 스스로 만족해 할만한 것들이 많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 학식,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역사가이고, 볼로냐에서 베이징까지 환대를 받는 사람이면서도 개인적 친교의 미묘한 기술에도 능한 남자이며,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유혈이 낭자한 한 세기를 살아남은 정치인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파티, 논쟁, 여행, 사상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에너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이 있는 사람(men of virtue)’ 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그가 성자라는 뜻이 아니고, 단순히 그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충만하게 발전시키고 사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가 보다 겸손한—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인--언어로 말하듯이, “매우 즐거웠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흥미로운 시대>는 냉철한 문구로 끝맺고 있다. 홉스봄은 미국을 좋아하지만 그와 그의 자식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할 의사가 없는 사회에서 살지 않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21세기는 “황혼과 어둠 속에서” 열렸다고 그는 말한다. 이 시대에 대해 그가 가진 지혜의 인도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손실이다. 


출처: The Nation 2003년 9월 15일


http://www.thenation.com/article/life-party


덧글

  • 문강 2012/10/02 13:47 # 삭제 답글

    시간을 들여 해주신 유려한 번역 덕분에 편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문어만두 2012/10/04 01:48 # 삭제 답글

    홉스봄 일생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번역감사합니다.
  • ㅁㅁ 2015/12/16 00:29 # 삭제 답글

    홉스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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