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2월 09일
로이 바스카,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로이 바스카 지음,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이기홍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07, 380쪽 ISBN 978-89-90106-3-8.
세계가 실재한다는 주장은 언뜻 너무 상식적이어서 누구의 흥미도 끌기 힘들어 보인다. 사실상 세계의 실재를 부인하는 사람—심지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까지 포함해서—은 거의 없다. 세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도 실재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이미 실재(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만약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픽션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실재론자이다. 그렇다면 “실재를 다시 주장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매우 다른 답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간 (사회)과학철학과 방법론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 및 협약주의/해석학은 각각 실재를 개인적 경험 및 집단적 관념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한다. 그 궁극적 결과는 과학에서의 인과적 필연성의 개연성으로의 대체(실증주의), 존재론적 상대론(협약주의), 혹은 사회과학에서의 인과적 설명의 부정(해석학) 등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현실의 과학실천과 지식은 인과적 필연성과 객관적 존재에 대한 설명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과학에 대한 해석(과학철학)과 과학의 자기 해석(과학실천) 사이의 이러한 궁극적 불일치는 마치 과학철학 없는 과학활동(맹목적인 객관주의적 실천)이나 과학활동 없는 과학철학(공허한 상대주의적 이론)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과학전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자들과 과학철학자/사회학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간극이 종종 발견된다. 그리하여 과학이 전제하는 실재의 특성들, 즉 인과성, 필연성, 객관성 등은 한편에서는 (경험주의적)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순전히 약속에 불과한 것 또는 최악의 경우 자기 기만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은, 그것을 단순히 객관주의의 일파로 짐작하던 사람에게는 놀랍게 들리겠지만, 이 양극단을 극복하려 한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별을 통해, 전자에서 인과성, 필연성 등으로 구조화된 실재가 과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조건임을 역설하고, 후자에서는 (모든 믿음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판단적 상대주의judgmental relativism와 구별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epistemological relativism 및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를 받아 들인다. 다시 말해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실천이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자리를 과학철학에 복원하는데, 이에 따르면 실재를 인식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지식의 우연성, 상대성, 오류가능성은 도리어 불가피한 것이다. 이렇게 비판적 실재론은 객관주의적 과학실천과 상대주의적 과학철학의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은, 종종 비판적 실재론 그 자체와 동일시되기까지 하는 저자의 글을 통해 직접 이러한 이론적 혁신들을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바스카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원래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가 칸트처럼 인간의 인식 또는 과학적 탐구의 조건(가능성과 한계)를 규명하려는 ‘비판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답을 이성이 아닌 존재에서 찾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는 본래 의미 그대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마치 지동설처럼 “실재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제9장). 그에 따르면 모든 과학은 존재의 성질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고, 세계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해명들의 경쟁은 존재론 차원의 해결을 요구하므로, 존재(론)은 인식(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제8장).
그러므로 그는 과학이 가능 하려면 과학의 대상, 즉 실재는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바스카는 여기서 실재를, 분화되지 않고 상호 필연적 관련도 없는 원자들로 구성된 폐쇄체계라기 보다는, 일정한 힘을 보유하면서 상호 관련되고 분화된 기제, 관계들로 구성된 개방체계로 개념화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탐구대상 중 하나인 인과법칙은 실증주의에서처럼 경험적 규칙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칙을 구성하는 ‘실재’하는 구조, 기제, 관계들은 규칙적으로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그것들이 ‘현실’화된다 하더라도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력이 작용하더라도, 사과가 항상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지는 않으며, 떨어질지라도 그것을 누군가가 항상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제2장). 이러한 실재-현실-경험의 존재론적 구별과 그에 따른 과학에 대한 탈실증주의적 재규정은 특히 사회과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과학의 대상이 상위, 즉 실재 수준의 인과법칙이라면, 사회과학에서 현실-경험 수준의 규칙성이 발견되지 않는다거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스카는 사회과학의 대상이 비록 변동하는 인간의 실천, 개념 및 시공간적 조건에 의존하는 해석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과학과 기본적으로 같은 방법론을 채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를 제창한다(제5장).
실증주의와 해석학의 이분법에 익숙한 이들에게 비판적 실재론은 낯설게 느껴지거나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짧은 논문들 속에서 철학적으로 혁신적인 논의들을 압축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더욱 읽기 어려운 책으로 느껴질 것이다. 더구나. 저자의 입장은, 과학에서 ‘경험’과 ‘해석’이 차지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적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은 최상의 지적 도전을 제기할 것임에 분명하다.
* 이 글의 축약판이 <교수신문> 제426호, 2007년 2월 5일자에 실림.
세계가 실재한다는 주장은 언뜻 너무 상식적이어서 누구의 흥미도 끌기 힘들어 보인다. 사실상 세계의 실재를 부인하는 사람—심지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까지 포함해서—은 거의 없다. 세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도 실재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이미 실재(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만약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픽션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실재론자이다. 그렇다면 “실재를 다시 주장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매우 다른 답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간 (사회)과학철학과 방법론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 및 협약주의/해석학은 각각 실재를 개인적 경험 및 집단적 관념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한다. 그 궁극적 결과는 과학에서의 인과적 필연성의 개연성으로의 대체(실증주의), 존재론적 상대론(협약주의), 혹은 사회과학에서의 인과적 설명의 부정(해석학) 등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현실의 과학실천과 지식은 인과적 필연성과 객관적 존재에 대한 설명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과학에 대한 해석(과학철학)과 과학의 자기 해석(과학실천) 사이의 이러한 궁극적 불일치는 마치 과학철학 없는 과학활동(맹목적인 객관주의적 실천)이나 과학활동 없는 과학철학(공허한 상대주의적 이론)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과학전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자들과 과학철학자/사회학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간극이 종종 발견된다. 그리하여 과학이 전제하는 실재의 특성들, 즉 인과성, 필연성, 객관성 등은 한편에서는 (경험주의적)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순전히 약속에 불과한 것 또는 최악의 경우 자기 기만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은, 그것을 단순히 객관주의의 일파로 짐작하던 사람에게는 놀랍게 들리겠지만, 이 양극단을 극복하려 한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별을 통해, 전자에서 인과성, 필연성 등으로 구조화된 실재가 과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조건임을 역설하고, 후자에서는 (모든 믿음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판단적 상대주의judgmental relativism와 구별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epistemological relativism 및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를 받아 들인다. 다시 말해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실천이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자리를 과학철학에 복원하는데, 이에 따르면 실재를 인식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지식의 우연성, 상대성, 오류가능성은 도리어 불가피한 것이다. 이렇게 비판적 실재론은 객관주의적 과학실천과 상대주의적 과학철학의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은, 종종 비판적 실재론 그 자체와 동일시되기까지 하는 저자의 글을 통해 직접 이러한 이론적 혁신들을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바스카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원래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가 칸트처럼 인간의 인식 또는 과학적 탐구의 조건(가능성과 한계)를 규명하려는 ‘비판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답을 이성이 아닌 존재에서 찾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는 본래 의미 그대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마치 지동설처럼 “실재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제9장). 그에 따르면 모든 과학은 존재의 성질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고, 세계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해명들의 경쟁은 존재론 차원의 해결을 요구하므로, 존재(론)은 인식(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제8장).
그러므로 그는 과학이 가능 하려면 과학의 대상, 즉 실재는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바스카는 여기서 실재를, 분화되지 않고 상호 필연적 관련도 없는 원자들로 구성된 폐쇄체계라기 보다는, 일정한 힘을 보유하면서 상호 관련되고 분화된 기제, 관계들로 구성된 개방체계로 개념화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탐구대상 중 하나인 인과법칙은 실증주의에서처럼 경험적 규칙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칙을 구성하는 ‘실재’하는 구조, 기제, 관계들은 규칙적으로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그것들이 ‘현실’화된다 하더라도 ‘경험’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력이 작용하더라도, 사과가 항상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지는 않으며, 떨어질지라도 그것을 누군가가 항상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제2장). 이러한 실재-현실-경험의 존재론적 구별과 그에 따른 과학에 대한 탈실증주의적 재규정은 특히 사회과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과학의 대상이 상위, 즉 실재 수준의 인과법칙이라면, 사회과학에서 현실-경험 수준의 규칙성이 발견되지 않는다거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스카는 사회과학의 대상이 비록 변동하는 인간의 실천, 개념 및 시공간적 조건에 의존하는 해석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과학과 기본적으로 같은 방법론을 채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를 제창한다(제5장).
실증주의와 해석학의 이분법에 익숙한 이들에게 비판적 실재론은 낯설게 느껴지거나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짧은 논문들 속에서 철학적으로 혁신적인 논의들을 압축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더욱 읽기 어려운 책으로 느껴질 것이다. 더구나. 저자의 입장은, 과학에서 ‘경험’과 ‘해석’이 차지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적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은 최상의 지적 도전을 제기할 것임에 분명하다.
* 이 글의 축약판이 <교수신문> 제426호, 2007년 2월 5일자에 실림.
# by | 2007/02/09 03:27 | 실험기자재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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