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내 맘대로 시니컬한 해석 실험실

사실 이 CF가 타겟으로 하는 고객(카드 사용자—‘소비자’)층의 아버지 세대는 “인생을 즐겨라”라고 말한 세대라고 보기 어렵다. 차라리, 예외는 있겠지만 “공부 열심히 하라”, “부지런 하라,” “아껴 써라”라는 말을 더 많이 했을 세대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느닷없이 “아버지”가 “인생을 즐기라”라는 조언의 주체로 등장했을까?

최근 한국사회는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지배적인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한국적 특성이 발견된다. 첫째, 이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는 그 행태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완전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윗 세대, 즉 아버지 세대가 금기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도 많은 경우에 남들에게 드러내 놓고 노골적으로 추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이 분명히 행태상으로는 물질을 제1의 가치로 추구하고 돈을 쓰면서도 (전보다는 덜하지만) 아직도 물질 추구와 소비로부터 얻는 쾌락과 자기정체성 규정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이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는 서구와 달리 엄밀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개인주의란 칸트가 말하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성숙하고 주체적인, 즉 ‘계몽된’ 개인을 요구하나, 국내의 이른바 ‘개인주의’란 그런 주체와는 관련이 없고 대개는 라이프 스타일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분명히 ‘가치관’으로서의 개인주의가 전보다는 확산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인 정체성은 아직은 ‘가족’ 및 자신이 속한 (그러나 택하지는 않은) 다른 집단 속에서의 관계 속에서 지배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개인주의’라는 트렌드는 ‘개인주의화individualization’가 아니라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에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기반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인 것이다—가족을 기본단위로 한 물질적 부와 소비의 추구. 비록 그 속에서 가족간의 유대가 약화되어 가족 성원들이 개체화되어 가고 독신이 늘어나더라도 말이다.

이제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광고카피가 이런 한국적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명백해진다.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나지 못해 스스로 판단하기를 삼가하는 한국의 미성숙한 ‘개체’들이 죄책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마음껏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그리고 카드를 쓰게 하기 위해서는—그런 원죄를 부여했던 윗세대, 특히 가족인 '아버지'(보다 정확히는 '내 아버지' 대신 그 말을 해줄 수 있는 '내 아버지였으면 하는 여유로운 사람'?)의 권고가 필요한 것이다.




덧. 물론 특정 지역과 계층, 예를 들면 강남지역에서는 이미 10-20년 전부터 이것이 윗 세대에서도 노골적인 인생의 목표로 규정되었던 듯 하다. 맹모삼천지교(?)를 몸소 실천한 부모님 덕으로 나는 강남 8학군의 이름도 근사한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부모로부터 보고 들었던 게 달랐던 이 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대화 화제가 다른 지역 출신 학생들과 현저히 달랐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서부터도 지극히 물질지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투자’할 여윳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를테면 ‘“성공이 뭐냐"고 묻는 자식에게 "맛있는 거 많이 사주는 거" 라고 대답하는 젊은 아빠들이나 "신나는 거네" 라면서 좋아하는 애들을 보여주는 광고’는 충분히 통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겉으로는 그런 물질적 성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것이다. 원래 유교사회란 어떻든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라, 추구하는 가치가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부’(그리고 이제는 ‘부’가 있으면 ‘영광’도 자연히 따라서 온다)라고 해서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실은 전 사회에 물질주의가 팽배할 수 있는 역사적 기초가 매우 잘 닦여져 있는 셈이다.

덧글

  • 2005/11/02 21:4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임경준 2005/11/03 14:39 # 삭제 답글

    퍼가겠습니다. ^^
  • ㅎㅎ 2005/11/06 01:40 # 삭제 답글

    울 학교 화장실에 이런 글귀가 있더군요..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 pepe 2005/11/06 17:18 # 답글

    이글루 파인더에서 찾아도 패러디가 여러가지 다른 종류가 많이 나오는군요. 역시 성공한 광고군요. ㅋㅋ

    1.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쫓기면서 사는인생 자 시작이다~
    아버지는 혈압으로 쓰러 지셨다~
    아들에게 유언했지 니가 갚아라.

    2.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웃으면서 지르는 인생, 자 시작이다
    오늘밤도 누구보다 크게 지른다(하하하)
    지르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
    주저하는 여러분들 어서 질러요
    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걸 질러라
    그걸 질러라


    3.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웃으면서 쓰다 보면, 다 끝장이다.
    오늘밤도 실없이 크게 웃는다. 하하하
    웃으면서 살기에는 이젠 늦었다.
    앞에 있는 빚쟁이들 날 때리세요.
    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걸 잘라라~
    카드를 잘라라~
  • 카나리아 2008/02/25 21:49 # 삭제 답글

    전 유교에 대해 어릴적부터 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최근에 영국 교육정책 관련 글을 읽으면서 정책 실패 원인중 하나를 '노동자/저소득 계층의 교육의지 결여' 를 꼽는걸로 볼때 '맹모삼천지교' 같은건 긍정적으로 볼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 pepe 2008/03/06 00:58 # 답글

    저는 유교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유독 윗글만 부정적으로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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