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공상과학이고, 현실은 베버? 봉준호의 <기생충> 실험실

마르크스는 공상과학이고, 현실은 베버? 봉준호의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동시에 유머와 서스펜스가 넘치는 영화였다. 하지만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기도 했다. 아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한 것이다. 사실 간단한 내용인데 쓰다보니 계속 뭐가 덧붙여지고 길어져서 재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가급적 읽지 마시라. 리뷰는 <기생충>, <설국열차>, <위대한 개츠비> 스포일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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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계급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설국열차>에서는 명확히 (포스트-)마르크스적 스탠스를 취했다. 단지 계급 상승이 아니라 진정한 혁명, 자본주의 계급 구조의 파괴와 그로부터의 탈주를 그렸던 것이다. 멈추어서는 안되는 열차의 엔진은 너무나 명확하게 자본주의를 상징했고, 열차 앞칸은 1세계, 포드주의, 지배이데올로기, 타락한 상류계급을 보여주었다. 단지 열차의 주인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계급 불평등의 구조는 계속되니까. 그러므로 엔진 자체를 파괴해야 했다, 그리고 열차 밖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마지막 생존자 중에 백인 남성은 없었다. 황인 여성과 흑인 남성만 있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인에게 있어 진정한 명화란 특별히 비평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메시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작품이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 일치하는 경험을 제공할 때 비평이라는 소화제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내게 그러한 요건을 100% 충족시킨 영화였다. 그래서 내게 봉준호 감독 최고의 영화는 <설국열차>이다.

그런데 <기생충> <설국열차>보다 명확하고, 약간의 해석이 필요하다(그래서 그렇게명징하게직조되어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설국열차>보다는 못한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설국열차> 마르크스적 계급 스토리는 베버적 계급 스토리로 바뀌었다. 어떤 이들은 부르디외나 베블렌을 거명할지도 모르나 나는 베버의 계층론 안에 부르디외나 베블렌이 말하는 문화적 계급투쟁이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계급은 가족을 단위로 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계급 스토리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계급 스토리가 아니다. <설국열차>에서 계급은 가족을 넘어선 집단의 스토리였다. 반면에 <기생충>에서 계급은 가족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명백히 계급을 하나의 통일된(또는 통일될 있고 그래야만 하는) 사회 집단으로 보지만 베버는 명백히 계급을 통일된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계급이란 경제적 위치일 뿐이고 반드시 어떤 집단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은 비슷한 정도의 명예와 생활양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생충> 김기택(송강호), 박동익(이선균), 그리고 가사도우미 국문광네, 이렇게 가족의 이야기이고, 경제적으로는 같은 계급인 (속임수, 사기를 통해) 기생하는 가족이 일차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한다(가족단위 서사는 개인주의 서사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경향은 ()자유주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 가족 사이에는 같은 계급의식은 커녕 똑같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연대의식도 전혀 없다. 그러기는 커녕 살기위해 서로 살인 폭력을 행사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제 이건 클리셰가 되어버린 같다, 그렇지 않나?). 경제적인 위치가 비슷하다는 외에는 유사한 점이라고는 없는 하층계급은 분열되어 있는데, 반대로 상류계급은 문화를 매개로 집단으로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동익(이선균) 가족이 즉흥적으로 마련한, 막내 아들 박다송의 생일 번개에 초대한, 역시 상류층일 (또는 베버식으로 표현하면 비슷한 생활양식과 명예를 공유하는) 지인들은 영화 대사에도 나오듯이 처음부터 준비되었던 것처럼 너무나 서로 유기적으로 어울린다.

더구나 <설국열차>의 하층민들이 노동계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한 유추가 가능했다면, 김기택(송강호) 가족은 명백히 노동계급은 아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 보기도 어렵다. 그보다는 몰락한 중산층이다. 영화가 계급에 관한 것이라면, <,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백수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몰락한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이 등장한 것은 무엇을 뜻할까? 신자유주의 이후의 중산층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보다 설득력 있고 공감을 받을 있는 계급을 설정한 것일 있다. 어떻든 한국과 같이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역사가 길지 않고, 자영업자가 많은데다가, 특히 IMF 위기 이후 부도, 폐업, 실직이 일상화된 곳에서 중산층 정체성이 남아 있는 하층계급이나 몰락한 중산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몰락한 중산층이 반지하에 사는 일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잠깐 일했던 마케팅리서치 회사에서 소비자 인터뷰를 자택 방문에서 적이 있다. 집은 반지하가 아니라 그냥 지하에 살았다. 나야 당시만 해도 무늬만 사회학도이지 사회경험이란게 별로 없어서 전혀 못느꼈는데 같이 갔던 부장님께서 집은 지하에 살지만 아주머니 말씀하시는 것부터 수준이 있어 보인다, 망한지 얼마 안된 것처럼 집에 있는 가전제품의 급이 매우 높다, 최근에 뭐가 못되었나 보다, 안타깝다, 라는 얘기를 했고, 그제서야 뒤늦게 나도 그렇구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도 아주 잠깐 구반포의 강남 신도시에 살다가, 후로 반지하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몰락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영화 처음에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 처럼 보이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내용이 궁금하면 면대면으로 물어보시라). 몰락한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모든걸 포기하고 마침내 공장까지 가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또는 김기택(송강호) 가족처럼 공장조차도 없는일할 있는 아들과 딸도 둘다 백수이다그래서 기생의 유혹을 느낄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생충> 계급 구도는 결코 마르크스적인 이분법적인 자본-노동의 대립이 아니다. 첫째, 경제적 격차나 불평등을 보여주는 자체가 마르크스적인 것은 아니다. 베버적 시각도 충분히 그러한 구도를 보여줄 있다. 베버는 계급을 시장에서의 경제적 위치, 또는 소유와 소득 기회를 포함한 삶에서의 기회의 차이로 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폭우에 완전히 잠긴 반지하와 폭우에도 멀쩡한 미제 인디안 텐트를 정원에 저택의 차이는 계급이란 삶의 기회에서의 차이라는 베버의 계급 정의에 부합한다. 하지만 베버적 계급 구도에서 착취는 없으며, 계급은 능력과 자원에 따른 서열이나 불평등일 뿐이다. 기생충에서 김기택(송강호) 집과 박동익(이선균) 집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대립할 일은 없었다. 관계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의 착취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위로의 기생만 보일 뿐이다. 오히려 경제적 갈등은 사이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저택에 기생하는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다. 박동익(이션균)네가 운전기상와 가사도우미를 해고한 것도 결국에는 김기택(송강호)네가 꾸민 일이다. 사실 어쩌면 진정한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영화의 포커스는 여기가 아니라 반지하와 저택 사이의 대조, 그리고 문화적 갈등에 놓여져 있다.

물론 <기생충>에서 경제적 차이가 삶의 기회와 생활의 차이를 낳는 것은 너무나 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베버적인 계급 묘사일 뿐이다. 사실 부분은 계급간의 삶의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는 3세계 주변부와 서구 중심부를 대조하는 것으로 보일 같기도 하다(결말에서는 저택이 유럽계 백인에게 넘어간 것을 보라). 서구에서 이런 침수 장면은 허리케인으로 침수된 미국을 제외한다면 주로 3세계 자연재해에 관한 보도에서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감정이입 없이 아주 안전한 곳에서, 전후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는 이른바자연재해 포르노라고나 할까. 내게는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임팩트가 있었고 아마도 칸에서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그러므로 <기생충> 계급 갈등은 자본-노동이 아니라 상류층과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몰락한 중산층 백수 집안 사이의 갈등이다. 반지하와 대저택의 물질적,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사이의 갈등은 상징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베버에 따르면 갈등은 경제적 차원보다는 문화적 차원, 베버가 신분status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차이에서 일어난다. 명예와 생활양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른 서로간의 멸시와 질시에서 일어난다(부르디외는 이를구별짓기라고 불렀다). 베버의 용어를 따르자면 <기생충> 그리는 것은 계급갈등이라기 보다는 신분 갈등이다. 그러나 이것도 계층갈등임에는 분명하고, 계급이라는 개념이 베버가 정의하는대로 경제적인 것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최근의 사회학에서는 문화적 영역에서의 계층갈등을 계급갈등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이것도 계급갈등이라고 하자. 물론 신분갈등이든 문화적 갈등이든 이렇게 계급 갈등을 그리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갈등은 상징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경제보다 그게 훨씬 중요한 이슈일 있다. 더구나 마르크스의 시대와 달리 신중간계급이 형성되고 나중에는 조직화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유연 축적체제로 전환되면서 계급의 구성과 갈등은 다차원적으로 변화하였다. 김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이기에 어느 정도의 문화적 소양 (또는 부르디외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문화자본) 있다. 어느 정도의 교양, 그리고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국내외 명문대생 연기를 감쪽같이 있다. 베테랑 운전기사 역할도, 그리고 교양있는 가사도우미 역할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중상층으로서의 자존감 또한 약간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선을 넘는 ”, 상징적 위계에 도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게다가반지하의육화된 냄새는 어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냄새 자체가 아니라 냄새가 난다는 지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다. 아마 김기택(송강호) 본래 하층계급이었다면 그러한 멸시가 기분 나쁘긴 하지만 익숙해져 그냥 참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몰락한 중산층이었으므로 멸시를 끝내 견디지 못한 같다.

그래서 <기생충> 그리는 불평등은 경제적일지라도, 그것이 그리는 계급 갈등은 경제적 갈등이 아니라 상징적, 문화적 갈등이다. 영화 속에서 박동익(이선균) 가족은 악덕 자본가도 아니고 때로 역겹고 타락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특별히 위선적이지도 않으며, 가정교사,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를 특별히 착취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보기에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을 다소 불결하게 본다 또는 멸시한다, 그리고 조금 잘난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도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자본주의에서의 불평등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본가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없다. 그리고 그냥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과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기택(송강호) 뜬금 없이 오근세한테서 냄새난다는 (실제로 영화 속의 상황에서 악취가 났을 것이다) 마디에 뚜껑이 열려 박동익(이선균) 죽인다. 정작 기택(송강호) 가족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아들을 거의 죽일 뻔하고 딸을 끝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오근세( 가사도우미의 남편)인데 말이다. 기생이라는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하층 계급내 폭력이 갑자기 상징적, 문화적 갈등에 의해 촉발된, 계급간 폭력이 되어버린다.

김기택(송강호) 갑자기 오근세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거나 박동익(이선균)에게 적대감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둔감해선지는 몰라도 그럴 정도로 김기택(송강호) 박동익(이선균) 은근한 차별적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모멸감을 느꼈는지 드러나지 않는 같다.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재산을 다 날려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일까? 체육관 대피소의 너무나 평온한 모습은 충격을 애써 감춘 것이었을까? 아무튼 아무리 적대감이 생겼다고 해도, 겨우 마디 정도로 사람이 죽고 하나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야 하는가? 혹시 김기택(송강호) 가족이 과거에 멸시가 섞인 한마디에 풍비박산났던 것이라면 이러한 결말이 이해가 수도 있겠지만, 영화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는 없다. 혹시 다른 계급에 대한 멸시는 무엇이라도 정도의 죄악이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는가? 아니면 하층계급의 분노가 이렇게 크고 예측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도 갑작스레 당할 있으니 자본가 계급은 조심하라는 것인가—“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또는 결국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계급내 갈등이 아니라 계급간 투쟁이라는 것인가? 어떻든 영화는 김기택(송강호) 그래야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심리적, 사회적 설명이나, 그러한 행동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비판 없이 그냥 다짜고짜 (자본가이긴 하나 딱히 자본가로서 그려진 것도 아닌) 상류층 남자를 죽여버리고 살인자는 지하로 숨어 버린다.

이것은 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같다. 박동익(이선균) 죽음은 별로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쁘지는 않지만 불평등 위계에서 강자이기 때문에 죽어도 별로 동정할 만한 부분이 없게 느껴진다. 반면에 그가 짓지도 않은 죗값을 대신 치러버리는 바람에 비극을 초래한 다른 비극은 가려진다. 뭔가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국문광, 오근세의 죽음은 임팩트가 별로 없고 동정심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김기택(송강호) 가족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것은 딸 기정, 즉 여성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지하에 갇힌 아버지, 그리고 그를 구하겠다는 아들이라는 서사에 의해 가려진다. 더구나 앞서 말했지만 비극의 원인 또한 은폐된다. 영화에서 본래 비극은 사실 김기택(송강호)네와 가사도우미 가족의 갈등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초래한 것은 경쟁적으로 기생하지 않으면 없게 그네들의 형편, 그리고 그런 형편을 만들어낸,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것은 모두 박동익(이선균) 가족하고는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이다(차라리 이들을 정말 악랄하게 그렸다면…). 특히 후자는 영화에서 일부 묘사되고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비극의 궁극적 원인은 설명되지 않고 은폐된다. 따라서 영화는명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관객에게 위험한 메시지를 있다. 자본가는 무조건 나쁘다거나 (하지만 개인과 구조는 구별해야 한다), 노동계급이나 하층계급은 정말로 불결하다거나 위험하다거나, 자신의 책임은 외면하고 욕망에 가득차 있다거나 등등.

이러한 결말은 F. Scott Fitzgerald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결말과 비교될 있다. <위대한 개츠비> 어떻게 보면 한편으로는 개천용(?)—이번에는 몰락한 중산층이 아니라 아마도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놀라운 계층 상승에 성공한 개츠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수저 데이지와 남편 뷰캐넌 사이에 있는 문화적 계급 갈등으로 읽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게 되면 은폐 되는 것은 <기생충> 유사하게 -데이지 뷰캐넌 가족과 톰의 정부 머틀 윌슨, 그리고 톰의 자동차를 정비해주는 정비소 주인 조지 윌슨의 관계이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 <기생충>보다 위대한 것은 개츠비의 욕망이 김기택의 욕망보다 순수하다거나, 개츠비의 범죄가 김기택의 범죄보다 가볍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 결말에서 유한계급 톰과 데이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개츠비를 죽이는데 있다. 톰은 자본주의적 착취exploitation 아니지만 명백히 머틀을 성적으로 착취(이용)하고, 그리고 그의 남편도 정신적, 경제적으로 착취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연적 개츠비를 죽이는데 이용한다. 개츠비를 죽이고 조지는 자살한다. 결국 유한계급 자본가들이 사회의 하층계급을 이용하고 파멸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이 부주의careless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선”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도리어 개츠비는 위대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 이제 고전이 되었고 이러한 계급 스토리는 클리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클리셰를 탈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이 자본가를 죽이게 하고, 2명이나 죽인 살인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대신 지하에 갇혀 죄값을 치르게 한다고 해서 특별한 카타르시스가 생기는 같지도 않다. 오히려 관객은 이유는 명확히 없지만 김기택(송강호)네를 동정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기생충> 어쩌면 관객이 주인공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인식하고 거리를 두게 만드는 소격효과를 의도했으나 실제로는 관객이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게 만든 브레히트의 실패한 서사극에 비견될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기생충>에서 김기우(아들) 아버지 김기택(송강호) 구하기 위해 부자가 것을 결심한다. <설국열차>에서 그려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구조의 파괴와 혁명은 영화장르가 공상과학이었으니 가능했던 셈이다. 한국적 현실을 배경으로 블랙코미디-스릴러에서는 개별적으로 부자가 되는 외에는 탈출구가 없다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탈출구도 아니다. 베버는 탈출구가 없는 이러한 현실, “the tremendous cosmos of the modern economic order”철장(iron cage)” 비유했다. 김기우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고 현실은 여전한 반지하 집이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계획이 있든 없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하실 바깥을 향한 모르스 부호 신호는 허망하고 부질없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설국열차>에서도, <기생충>에서도남궁씨들은 계급갈등과 비극의 현장을 떠나려고 한다. 전자에는 떠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후자에서는 실제로 떠나버렸다. 성공한 건축가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떠나 버렸으나, 반대로 김기우는 성공해도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꿈을 꾸는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 지금의 현실에 탈출구는 없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울하게 봉준호 감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 <설국열차>, <옥자>에서 봉준호는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남겼지만, <기생충> 그러한 희망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살인의 추억>으로 회귀한 것일까? 그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라고 해도 나는 그를 비난할 없을 같다. 누가 그러한 희망을 쉽게 말할 있겠는가. 그러나 봉준호에게 황금종려상을 영화제는 비난할 있을 같다. 하층계급의 행태와 분노를 무섭지만 기괴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계급 상승을 수는 있어도 계급 불평등의 구조 자체는 어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영화를 보고 안도한 것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주형 / 경남대 사회학과)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현실"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실험실

지주형,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현실”, <경제와 사회> 104 (2014년 겨울), 14-55.

https://dl.dropboxusercontent.com/u/17704840/%EC%A7%80%EC%A3%BC%ED%98%95%20-%20%EC%84%B8%EC%9B%94%ED%98%B8_%EC%B0%B8%EC%82%AC%EC%9D%98_%EC%A0%95%EC%B9%98%EC%82%AC%ED%9A%8C%ED%95%99%20%5B%EA%B2%BD%EC%A0%9C%EC%99%80%EC%82%AC%ED%9A%8C104%202014%5D.pdf

 

이재훈, “서해훼리호와 세월호 사이 21한국엔 무슨 일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1892.html?recopick=5

 

백승연,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 때문인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73801.html

 

백승연 씨가 필자의 논문에 대해 간략한 비판을 한겨레 신문에 투고했다. 오해와 무지로 가득한 글이다.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다고 자신이 그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여러 번 반추해보지 않고 떠오른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백승연 씨의 글은 바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사회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는 시비가 자주 붙기 마련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듯이 그들의 분석대상이 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귀 뿐만 아니라 혀가 있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혀가 똑같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백승연 씨의 글은 사회과학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이 얼마나 잘못된 논리를 전개해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는 글을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학자가 그러한 글에 반드시 응답할 이유는 없다. 무사는 덤벼드는 시정잡배에 함부로 칼을 휘두르기 보다는 피해가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필자도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사가 시정잡배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 참을 만큼 성인군자가 되지는 못한다. 특히 주변 지인들이 여럿 백승연 씨 글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니 해명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백승연 씨에게 응답하는데 있지 않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그의 글을 읽고서 필자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시켰다거나 비정규직 신분을 책임감 부재와 잘못 연관지었다고 오해할 분들, 특히 학문에 몸을 담그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지인들에게 필요시 보여주는데 있다. 경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읽기에 까다로울 것이다.

 

1. 백승연 씨의 비판과 그에 대한 간단한 답변

 

먼저 백승연 씨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겠다.

 

지 교수는 세월호 승무원 대다수가 단기계약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비정규직 선원과 선장한테는 애초부터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이라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비정규직이 직장 충성도가 낮을지는 모르나 직업윤리가 낮아야 할 이유는 없다. 뛰어난 직업윤리를 보여준 이가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정규직 노동자가 무책임 했다는 것은 비정규직/정규직과 직업윤리 또는 책임성은 무관하다는 증거이다.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선원과 선장들의 무책임함은 그들의 직업윤리 부재에서 유래한 것이지, 고용조건에 따른 직장충성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네덜란드나 미국의 예에서처럼 신자유주의 정부라도 능력이 있다면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는 동시에 적절한 조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 치졸한 행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적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대처 과정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것은 근거나 논리가 엉성하다.

 

그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 그럴 듯하다. 물론 필자의 논문이 완벽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백승연 씨가 주로 이의를 제기한 부분, 즉 비정규직 신분이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필자만의 견해가 아니며 필자가 논문에서 해당 부분의 근거로 사용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협의회의 견해이기도 하다. 필자 개인이라면 몰라도 그가 비판하는 변호사들을 포함한 진보진영의 논리가 그렇게 허술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뜯어보면 백승연 씨의 주장은 겉보기와 달리 대부분 잘못되었다. 백승연 씨의 주장은 필자의 주장에 대한 1) 오해와 2) 어설픈 사회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있다.

 

2. 백승연 씨의 불성실한 독해

 

백승연 씨의 주장은 필자의 논문에 대한 불성실한 독해에 근거해 있다. 첫째, 백승연 씨는 글의 마지막에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논변은 정부와 해경의 무능을 질타하며 정부의 축소와 시장의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과 방향만 다를 뿐 근거가 엉성하다는 점에서 논리의 수준은 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논변을 전개하지 않았다.

 

첫째, 필자의 논문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논문이 아니다. 논문의 포인트는 (지금 보니 오해를 초래할 부분, 즉 불명확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세월호 참사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일어났다는, 너무나 흔한, 별로 논문으로 쓸만한 가치도 없는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인트는 그것을 전제한 후에 세월호 참사의 정치화는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사회 퇴보에 대한 인식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에 있었다. 그 때문에 논문의 제목은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현실이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세월호 참사의 연관관계를 충분하고 자세하게 논증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논증할 수 있었다면 백승연 씨와 같은 이의가 제기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의 이의 제기는 일차적으로 필자가 쓴 논문의 목적에 대한 오독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그렇다면 논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실제로 논문 앞에서 쓴 말은 다음과 같다.

 

서해훼리호 침몰과 같은 다른 재난사고와 달리 세월호 참사가 이렇게 예외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발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 필자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세월호 참사의 전모를 밝히거나 세월호 유가족의 시위와 요구의 전개 및 그에 대한 사회적 지지의 확산을 낳은 사회운동의 동학을 밝히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서해훼리호 침몰 등 다른 참사들과 구별되는 세월호 참사의 예외적 정치화로부터 현재 우리 사회의 좌표를 읽는데 있다.

 

더구나 위에 보이듯이, 필자가 세월호 참사의 중요한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원인이라고는 어디서도 주장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화가 세월호 참사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논문의 목적은 세월호 참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순화한 것은 오히려 필자의 논문을 곡해한 백승연 씨이다.

 

둘째, 필자는 논문 어디에서도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도 치졸한 행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적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필자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이념적 프로젝트로만 국한해 쓰지 않으며,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프로젝트가 정부와 대통령의 무책임함을 조장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획"이라니! 논문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러한 함의를 가진 부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백승연 씨 자신의 얄팍한 신자유주의 이해에 바탕한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무책임함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문제를 다룬 논문(필자는 그 논문을 인용했다)이 이미 있기에 논문에 특별히 설명을 더 하지 않았지만 이 글의 뒷 부분에서 내 나름대로 추가설명을 덧붙이려고 한다.

 

셋째, 백승연 씨는 높은 직장충성도가 반드시 직업윤리를 담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요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선원과 선장들의 무책임함은 그들의 직업윤리 부재에서 유래한 것이지, 고용조건에 따른 직장충성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필자가 논문에서 비정규직 --> 낮은 직장 충성도 --> 직업윤리 부재로 설명을 전개한 것처럼 주장한다. 직장 충성도가 높아도 직업윤리가 부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옳지만 필자는 논문 그 어디에서도 비정규직의 직업윤리 부재가 낮은 직장 충성도에 기인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심각한 오독이다. 뒤에 보겠지만 필자는 다른 식으로 비정규직과 책임감 부재를 연관 짓는다. 낮은 직장 충성도와 직업윤리 부재를 연결시킬 수 없다는 백승연씨의 비판은 비정규직과 책임감 부재를 연관 짓는 여러 설명 중 하나의 설명에 대한 비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만으로는 비정규직이 책임감이 낮다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3. 백승연 씨의 아마추어 사회학과 철학

 

백승연 씨의 주장은 철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 허술한 토대 위에 서 있다. 비정규직이라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주장은, 그것에 대한 논거가 논문에서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것일 수는 있어도, 곧바로 논리적 비약인 것은 아니다. 백승연 씨가 이 주장이 논리적 비약이라고 보는 까닭은, 비정규직과 직업윤리는 무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정규직이 무책임하고 비정규직이 책임감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로 뒷받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비정규직의 낮은 직업 충성도가 아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적시하지 않은, 그러나 비정규직 탓은 아닌) 직업윤리 부재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정규직이 무책임하고 비정규직이 책임감 있게 행동했다는 사실로부터 비정규직과 직업윤리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야 말로 논리적 비약이다. 더구나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그들의 낮은 직업윤리로 설명하는 것은 동어 반복에 가깝다. 직업윤리 부재란 곧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

 

우선 비정규직이 직업윤리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그러한 반례로 간단히 반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순진한 형태의 실증주의적 반증주의이다. 일례로 백승연 씨는 정규직이냐 아니냐가 직장 충성도에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규직이어도 충성도가 낮은 경우, 비정규직이어도 충성도가 높은 반례는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백승연 씨는 비정규직이 직업윤리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반박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비정규직이 직장 충성도를 낮춘다는 명제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나의 명제를 간단한 반례로 반박할 수 있다는 것만큼 순진한 과학철학은 없다.

 

다음으로 백승연 씨는 사회학적 설명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사회학적 설명은 개인의 행동이나 윤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사회학적 설명은 개개인의 행동이나 윤리를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개개인의 윤리는 애초에 구조적 변수로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회학적 설명은 개인의 행동이나 윤리 등을 설명하는 대신 개인들과 구별되는 집합적 현상(뒤르케임의 표현을 따르면, 개인적 사실이 아닌 사회적 사실’)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집단의 행동이나 윤리의 패턴이나 추세를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행동이나 윤리에 대한 몇 가지 반례는 사회학적 설명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다.

 

비정규직이어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사회학적 명제로서, ‘모든 비정규직은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다거나 모든 정규직은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명제와 동치가 아니다. 그것은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집단은 책임감이 낮은 경향을 보일 것이라는 명제이다. 이러한 명제를 몇 가지의 반례만으로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서 본 것은 주로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 이것이 왜 논리적 비약인가? 직업형태가 직업윤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닐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함이 낮은 직장 충성도보다는 직업윤리 부재 때문이라는 백승연 씨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무책임을 직업윤리 부재로 설명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러한 직업윤리 부재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백승연 씨는 설명하지 않는다. 즉 그는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집단은 책임감이 낮은 경향을 보일 것이라는 사회학적 명제에 대해 충분한 반례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세월호 선원들이 보인 무책임함을 비정규직이 아닌 다른 보다 강력한 원인에 의해 설명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무책임과 직업윤리의 부재가 비정규직과 무관하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전혀 반박 증거가 될 수 없는 개인적 반례 외에는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집단은 왜 책임감이 낮은 경향을 보일까? 적어도 필자는 앞서 설명했듯이 어디서도 백승연 씨가 비판하는 설명방식, 비정규직 --> 낮은 직장 충성도 --> 직업윤리 부재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필자가 생각하는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정규직에게 부여되는 권한과 책임은 정규직보다 작다. 따라서 집합적 수준에서책임감을 키우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세월호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사고가 났을 때 승객 대피보다 본사와의 연락에 더 신경 썼던 이유이다. 더구나 문제가 책임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이 되면 그것은 더욱더 집합적 수준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필자가 논문에 쓴 문장을 인용한다.


그들이 이렇게 무책임했던 것은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월급 270만 원에 1년 계약직이었던 선장뿐만 아니라 갑판부와 기관부 선원 17명 가운데 12명이 4개월에서 12개월짜리 단기 계약직이었고 임금도 다른 해운사에 비해 20~30퍼센트 정도 적었다. 이에 따라 선원들의 높은 소속감과 책임감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게다가 그들은 제대로 된 안전 교육과 해양사고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민변, 2014: 27, 155~160). 안내방송을 담당한 승무원은 선박 사고시의 탈출 요령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930분경 선장과 다른 선원들이 탈출하여 더 이상 지시가 없었는데도 고지식하게 배가 80~90도로 기운 10시경까지 대기하라는 방송을 계속해 참사를 키웠다(서울신문,2014.5.10.).

 

첫 문장을 보면 필자가 선원들의 무책임함이 비정규직 때문인 것만으로 단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석이 있다라는 것은 그러한 해석이 있으며 기껏해야 그것에 일리가 있다는 뜻이지 그것을 유일무이한 원인으로 파악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음 문장들을 보면 백승연 씨가 필자의 논문을 곡해했다는 것이 더 잘 드러난다. 무책임한 행동의 원인에는 단지 비정규직이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안전교육이나 해양사고 훈련의 결여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행동은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생각이나 감정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실제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비정규직 문제는 세월호 참사의 중요한 원인이 된 신자유주의의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현실에는 비정규직, 그리고 그것이 낳은 낮은 직업윤리와 책임감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부족이 포함된다.

 

백승연 씨는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의문 또한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주장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오히려 비윤리적인 비정규직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 그 반대로 그들을 차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비정규직에게 높은 책임감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집단에 대한 사회학적인 인과적 설명과 개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정규직으로 신자유주의의 각자도생을 체화한 그들에게는 일에 대한 책임도, 승객들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물론 최소한의 도리도 하지 않은 그들에게 그들의 무책임이 교육과 훈련부족 때문이라는 면죄부를 줄 필요는 없다).

 

물론 이 문장에는 그들의 무책임이 교육과 훈련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오해될 소지가 약간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의 무책임이 교육과 훈련부족 때문이라는 면죄부를 줄이 아니라 그들의 무책임이 상당부분 교육과 훈련부족에 기인하지만 그렇다고 면죄부를 줄이라고 썼어야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반면 백승연 씨가 우려하는 것과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비정규직에서 발견되는 무책임한 경향성은 차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승연 씨는 만약 비정규직이 무책임하다고 판명되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정당하다고 볼 것인가? 비정규직 차별은 책임/무책임과는 독립된 문제이다.

 

끝으로 네덜란드나 미국과의 비교에 대해 언급하겠다. 백승연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 같다. 네덜란드나 미국이 한국과 동일한 신자유주의이지만 세월호 참사와 같은 어설픈 대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처에 대한 원인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어설픈 비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의 원인은 다양한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사건 A의 원인이 A‘이 아니라고 해서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 A의 원인이 A’가 아니라고 볼 근거는 없다. 또한 다른 곳에서 원인 A‘가 있었지만 사건 A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A’가 사건 A의 원인이 아니라고 입증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한두 가지 사례로 반증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A’의 작동을 방해하는 B라는 요인이 있을 경우 A’A라는 사건을 결과하지 않을 수도 있다(~A). 간단히 말해 네덜란드나 미국도 신자유주의인데 한국과 다르게 사고에 대한 처리와 대응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자유주의가 세월호 참사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정부(A')라도 능력(B)이 있다면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는 동시에 적절한 조처(~A)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백승연 씨의 주장은 신자유주의 정부(A)인데  능력이 없다(~B)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것(A)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논문에서 필자의 논지는 바로 세월호 참사를 낳은 무능력의 근원에는 구조작업의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외주화가 있었다는 것이었다(A' --> ~B --> A). 백승연씨는 논문의 기본 논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을 한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미국 정부는 더 잘 했을 것이라는 것은 가정일 뿐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그런 가정을 하기 보다는 미국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가 어떻게 일어나고 처리되었는지 살펴 보는게 더 좋을 듯 하다. 미국의 카트리나 참사는 이후 재난대비와 방지 대책의 측면에서 한국과 다르게 매우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만, 그 이외의 측면에서는 재난의 인재로서의 성격과 정부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세월호 보다 더 심했다는 평가까지 보인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많은 이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들고 있다. 물론 카트리나 참사를 두고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하지만 이로써 분명한 것은 백승연 씨의 생각대로 미국이라면 어땠을까라고 가설적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와 신자유주의의 연관이 자동적으로 반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질문으로부터 미국이라면 달랐을 것이다라는 답을 내리고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와 세월호 참사의 연관은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백승연 씨에 의하면 필자가 채택했다는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 치졸한 행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적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먼저 앞에서 설명했듯이 필자는 논문 어디에서도 그런 관점을 채택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면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 치졸한 행동을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필자가 논문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서 간략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내가 사용하는 신자유주의 개념은 경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를 포함한 총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신자유주의는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금융화, 유연화, 사영화 등)에 걸맞는 정치체제와 권력관계를 동반한다. 이는 최근에 종종 포스트 민주주의권위적 국가주의등으로 개념화되고는 한다. 이는 금융자본, 초국적 자본을 포함한 기업의 권력 강화로 국가가 포획되는 동시에, 노동계급의 약화 및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족주의의 확산, 그리고 그에 따른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와해와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 물론 특정한 지도자와 정부는 상대적으로 더 무책임하고 한심하고 치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감히 그럴 수 있는 것은 결국에는 국가와 정치체제가 신자유주의(기업권력 강화와 개인주의/가족주의 확대)가 만들어낸 비민주적인 사회권력 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즉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함은 이념적 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낳은 직접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성공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근거가 엉성한 것은 필자의 논변이 아니라 백승연 씨의 논변이다.




전략관계론적 접근: 밥 제솝과의 인터뷰 (2006) 실험기자재

8년전 인터뷰. 영어인 데다가 녹음상태도 안좋아 10분에 1시간씩 걸려 녹취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서 2009년에 지도교수님이 다시 내용을 말끔하게 수정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내겐 거의 다 해 놓고도... 끝마무리할 시간이 없어, 또는 게을러서, 또는 어쩌다 보니.... 세상에 공개하지 못한 것들이 꽤 많은데, 이것도 그러하다. <경제와 사회>에 게재를 타진해 보았으나 시의적절한 내용은 아니어서 실패한 후, 새로 나올 책의 국내 번역본에 실으려고 생각중이었는데, 그 책(http://www.amazon.com/The-State-Present-Future…/…/0745633056)의 출간이 계속 늦어지는 사태가... . 몇 년 전에 영문 원본을 공개하시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결국 올라왔다. 아마 직접 공개하시지 않으셨으면 게으른 제자 탓에 영원히 공개가 안되었을 수도.  


영어원문은 다음 링크에 있다.

http://bobjessop.org/2014/12/02/the-strategic-relational-approach-an-interview-with-bob-jessop/


다음에 올리는 것은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4, 5부이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에 대한 기본 지식(참조: http://moraz.egloos.com/537952, http://moraz.egloos.com/852250)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지만 토니 블레어의 개각, 인터뷰에서의 위치, 전간기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등에 관한 예시는  기본 지식이 없어도 구조, 권력, 정치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인터뷰에는 책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또는 내가 흥미를 갖기로는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은 보통 오해하는 것과 다르게 국가론이 아니라 그 보다 상위의 사회이론이었고 따라서 국가론에 관한 인터뷰보다는 사회이론에 대한 질문들을 위주로 던졌었다. 이와 더불어 나 자신 불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과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점들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질문을 던졌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 밥 제솝과의 인터뷰 - 4, 5부

IV. 핵심 개념으로서의 전략적 선택성(Strategic Selectivity)


Q. 국가가 사회관계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관계적인 것은 국가입니까, 국가권력입니까? 아니면 둘 다 인가요? 당신이라면 국가가 ‘사회관계’라는 것을 보통사람들에게 어떻게 쉽게 설명하시겠습니까?


A. 풀란차스에 의해 최초로 명시적으로 발전된, 국가는 사회관계라는 생각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자본이 사회관계라는 맑스의 주장과 같은 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관계란 사물들의 도구성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장을 국가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국가권력)가, 사물들의 도구성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또는 더 낫게는 정치세력들간의 사회관계라는 주장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사물들’의 성격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국가기구, 국가역량, 국가자원, 정치적 계산의 특정한 양식 등을 언급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통사람들에게 설명하려면 몇 가지 분명한 예를 들어 보이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여러 다른 투표 제도가 소수정당이 선거에서 의석을 얻을 확률에 주는 영향, 집중화된 국가에서와 달리 탈집중화된 국가에서 주변부 지역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 민주적 국가와 예외적 정권에서의 의사결정에 하위집단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의 차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전략관계론의 주장은 국가란 정치세력들이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하고 목적을 실현하려고 투쟁하는 중립적 지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국가기구, 국가역량, 국가자원의 조직(더 구체적으로는 대의제 형태, 국가의 내부 구조, 국가개입의 형태, 국가의 고유한 사회적 토대, 특정한 국가 프로젝트, 그리고 광범한 사회에 대한 통치의 본성과 목적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이 의미하는 것은 국가가 다른 것들보다 특정한 세력, 특정한 이해관계, 행위의 특정한 시공간적 지평, 특정한 프로젝트에 더 우호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정치적 투쟁에 세 가지 수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의 구조적으로 각인된 선택성(structurally-inscribed selectivity) [차별적인 성격]을 변형하려는 투쟁, 선택성의 한계 내에서 발생하는 국가정책에 대한 투쟁, 그리고 국가역량과 자원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계산에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이해관계들이 고려될 수 있도록, 국가 내부의 세력들 및 국가에 대해 특권적인 접근권을 가진 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바꾸려는, 국가로부터 거리를 둔 투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분석적으로가 아니라면 국가와 국가권력을 분리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한 다음에만 국가와 국가권력을 분리시키고 그럼으로써 전체로서의 국가가 가진 더 구조적이고 더 전략적인 측면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상보적인 개념들의 집합을 생성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습니다. 국가기구를 분석하기 위해 좀 더 구조적인 개념을 개발할 수 있겠지만, 오직 전략관계론적 방식으로만 그래야 할 것입니다. 국가권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더 전략적인 개념들을 개발할 수 있겠지만, 그 개념은 그럼에도 변화하는 구조와 국면에 대해 전략적 분석을 수행하는 행위자들의 차별적인 역량을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옥스포드 정치제도 편람>에 수록한 ‘국가와 국가건설’에서 더 상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States and State-Building', in The Oxford Handbook of Political Institutions, edited by R. A. W. Rhodes, Sarah A. Binder, and Bert A. Rockm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Q. 전략적 선택성이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첫쨰, 그것은 시스템이 ‘사전적(ex ante)’으로 가지고 있는 확률입니까, 아니면 ‘사후적(ex post)’으로 특정한 전략들에 전체적인 무게를 실어주는 다중적이고 다양한 효과들입니까? 또는 두 가지 이상의 힘에 의해 생성된 벡터(parallelogram)입니까?


A. 이들 중 어느 것과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위자들은 사전에 전략적 맥락의 분석(ex ante strategic context analysis)을 수행할 뿐 아니라, 사후적으로도 자신들이 목적을 얼마나 잘 달성했는지 평가하고 이것이 다음의 사전적인 계산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성찰적인 사회세력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중요할 것입니다. 동등하게,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도 구조적으로 각인된 전략적 선택성에 대해 사전적이거나 사후적인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국의 주요 정당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확률에 대해 계산할 수 있지만, 이는 오직 확률론적일 따름입니다. 투표 결과가 나온 후에는 이제까지의 계산을 다시 검토하고 새로운 정보를 투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세력들간의 벡터라는 아이디어는 너무 기계론적으로 보여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전략관계론적 관점에서는 시공간적 해결책의 복잡성과 행위지평의 다중성, 그리고 여러 다른 기회들은 세력들간의 벡터의 특성(parameters)을 확정하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정치의 비예측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은 전략적 행위자들이 이러한 특성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Q. 구조적 선택성과 전략적 선택성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전략적 선택성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A. 구조적 선택성의 개념은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가 가끔씩, 행위를 통해 어떤 차이를 만들 여지가 없는 것, 나라면 구조적 초선택성(structural super-selectivity)이라고 부를 것을 지칭하기 위해 가끔씩 이 말을 썼었습니다. 그는 이 개념을 국가를 담당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국가권력에 대한 도구주의적 견해와, 국가권력에 대한 외부의 구조적인 제약 때문에 국가관리자들에게 기동할 [정책을 전환할] (maneuver) 자유가 없다는 구조주의적 설명 사이에 있는 제3의 길로서 이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따라서 오페에게 있어 구조적 선택성이란, 국가를 통제하려는 사회세력들은 국가기구를 재생산하는 동시에 자본의 공생적(symbiotic)인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정치권력의 본래적인 (inherent) 논리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는 국가가 그 자원(세금과 대부)과 정치적 정당성(성장의 달성, 위기관리 등)을 얻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권력을 형성하는 것은 주의주의적인 행위자들이나 외부의 제약이 아니라 국가 자체에 새겨진 구조적 제약이라는 것입니다. 풀란차스도 (오페로부터 개념을 빌려와) 구조적 선택성에 대해서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그는 이 개념을 전략적 선택성의 의미로 씁니다. 내가 전략적 선택성 개념을 선호하는 까닭은, 여기에는 행위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된 논문들(다른 곳에서는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에 제시된 바 대로의 오페의 설명에는 행위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자본의 논리를 국가 내부로 옮겨왔을 뿐입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은 행위에 더 큰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이것은 풀란차스가, 특히 그가 푸코의 권력과 저항에 대한 아이디어를 자신의 이론에 통합했을 때, 구조적 선택성을 해석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Q. 전략적 선택성의 개념과 상대적 자율성의 개념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전자가 후자의 개념을 대체한 것입니까?


A. 나는 더 이상 상대적 자율성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순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개념을 작동적 자율성(operational autonomy)와 물질적 상호의존(material interdependenc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작동적 자율성 개념은 행위의 여지를 남깁니다. 물질적 상호의존의 개념은 순전한 외부적 제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조적 결합(structural coupling)과 공진화(co-evolution)를 통해서 작동적 자율성에 사후적인 [선험적이지 않은] 한계[제약]를 가합니다.


Q. 국가의 전략적 선택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국가체계/제도/구조/물질성에 있습니까, 아니면 광범한 사회관계나 국면적 상황에 있습니까? (국가 및 형태규정된 관계로서의 제도적/물질적 기구/장치와 같은) 체계/구조에 있습니까, 아니면 체계/구조를 포함한 더 넓은 관계에 있습니까?


A. 국가의 전략적 선택성은 모든 곳에 있습니까, 아니면 어느 곳에도 없습니까? 완전한 대답은 그것은 이 모든 요소들과 사회세력들의 행위로부터 발현(emergent)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전략적 선택성을 순수히 구조에 위치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 구조들을 물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은 이러한 유혹을 피하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어떠한 구조도 모든 행위자들에게 똑같은 제약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정이 지어져 있든) 각각의 '구조' 는 다른 유형의 행위자들에게 다른 제약과 기회를 부여합니다. 실로 나는 <자본주의와 국가(1982)>에서, 제도적 앙상블이든 조직형태든지 간에 모든 주어진 구조의 구조적 계기와 국면적 계기를 구별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조적 계기란 어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어떤 시공간적 모태(matrix) 속에서 행위의 특정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행위하는 어떤 주어진 행위자(들의 집합)이 바꿀 수 없는 측면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국면적 계기란, 바뀔 수 있는 측면들을 말합니다. 주어진 구조의 구조적 계기와 국면적 계기가 무엇이냐는 행위자들의 위치에 따라 분명히 달라집니다. 핵심 포인트는 구조는 모든 행위자들을 동등하게 제약하거나 돕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이것은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이 기든스(Anthony Giddens)의 구조화 이론(structuration theory)과 다른 또 하나의 지점이기도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는 최근[2006년]에 개각을 했습니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나는 내각의 구조, 구성, 규칙, 그리고 결정 등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가까운 미래에는 전혀 내 통제 바깥에 있는 일이고 따라서 순수한 구조입니다. 내가 만약 잭 스트로우(Jack Straw)이고 조지 부시(George Bush)가 내가 외무성 장관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 토니블레어는 나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나는 약간의 협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쫓아낼 수는 있소, 그렇지만 내가 내각 안에 남아있기를 거부한다면, 바깥에서 나는 당신한테 더 위험스러울 수도 있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각의 구조는 나[밥 제솝]보다는 잭 스트로우를 덜 구속합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이 토니 블레어의 개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가 개각에 반대하는 한 두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블레어를 레임덕으로 간주하고 그가 실각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내각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이상 자신들의 전략적, 전술적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어는 스트로우보다 내각의 구조에 대해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각 구성, 포트폴리오의 배분, 운영방법 등 여러 가지 것들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정한 순간에는 매우 큰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잭 스트로우를 마가렛 베켓(Margaret Beckett)으로 일단 교체하면 이를테면 2주 후에,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선언하고 최초의 여성 외무성 장관을 해임할 수 없습니다. 2주 동안에 두 명의 외무성 장관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내각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특정한 시점에는 내각의 구조가 그에게는 그다지 구조적이지 않고,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습니다만, 일단 그가 개각을 끝낸 후에는 그의 손은 아마도 4-5개월간, 아마도 전당대회까지는 묶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어가 내각과의 관계에서 다른 어느 행위자들보다 더 힘이 세더라도, 이는 그 자신의 결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로형성적이고 경로의존적인 속박(lock-in)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략적 선택성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략적 선택성을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행위자고, 어떤 시간지평을 보고 있으며. 다른 행위자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잠재적인 동맹자이며,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을 물어야 합니다. 이는 또한 자기성찰적인 행위자들이 특정한 국면에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앞의 예를 계속해서 말하자면, 블레어가 내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은 지난 9년간 변화하여 왔으며, 분석을 요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전략적 선택성은 사례별로 분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시스템이나 구조에 배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관계나 국면적 상황"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Q. 무엇이 전략적 선택성을 구성할 수 있습니까?


A. 주어진 맥락에서 특정한 전략적 목적을 추구하는데 적절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략적 선택성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략적 선택성의 진리는 전체(whole)에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는 너무나 복잡해서 전략적 행위자에게나 편파적이지 않은 관찰자에게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 복잡성의 축소는 필수적이며, 이것이 바로 적절한 이론과 상상력에 기초한 전략적 맥락 분석이 하는 역할입니다. 많은 것이 탐구하고 있는 구조의 규모와 행위의 시공간적 지평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뿐만 아니라] 인터뷰와 같은 대인간 상호작용의 전략적 선택성이나 레짐, 제도, 조직, 네트워크, 그리고 지구적 규모의 축적 과정을 형성하는 상호작용들의 앙상블로서의 세계시장의 전략적 선택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단지 전략적 선택성을 찾아 보면 됩니다. 전자[인터뷰]에서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은 후자에서는 거의 확실하게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인터뷰가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이 구체적인 행위자들에 따라 달라지는 구조적 계기와 국면적 계기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 그리고 구조들과 전략들을 물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인터뷰에서의 대인 상호작용을 연구한다면, 장르로서 존재하는 여러 유형의 인터뷰들이 가지고 있는 당연시되는 구조들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인터뷰어를 인터뷰 당하는 사람보다 더 힘센 위치에 놓습니까? 만약 BBC2의 제레미 팩스만(Jeremy Paxman)이 당신을 인터뷰한다면 그는 어떤 측면에서는 당신보다 더 힘센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신출내기 연구자이고, 핵심적 정보통을 인터뷰한다면 권력은 다른 쪽에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일반적으로 인터뷰에 구조적인 비대칭성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대칭성의 속에서도 솜씨 좋은 해석과 장르 조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인터뷰 질문을 받는데 능숙하다면, 어떤 질문에 대답하고 싶은지, 어떤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을 것인지, 어떤 질문을 예외로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인터뷰의 장르 안에서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능숙한 인터뷰어라면, 예를 들면 질문의 순서, 인터뷰 순서 등에 대해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장르 그 자체가, 예를 들면,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나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권력관계의 변화를 통해 변화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사회학적으로 무정형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조직, 제도적 앙상블, 역사적 블록, 그리고 복잡한 지구체제까지 세계 사회의 수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규모를 가진 다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라크전을 둘러싼 미국과 터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해 사전 예측이 그것입니다. 여러 관찰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터키는 자신의 영토를 가로질러 이라크를 침공하게 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떻게, 기대된 확률과 다르게 터키가 저항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을 이후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대한 사후적인 분석을 요구합니다.


V. 방법론적 해명(Methodological Clarifications)


Q. '전략적 선택성'의 개념이 단지 서술적 힘뿐 아니라 설명적 또는 예측적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A. 나는 예측과 설명 사이에 논리적 대칭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에서는 반드시 대칭성이 있는 것은 아니죠. 왜냐하면 사후적 설명과 달리 사전적 예측에 수반된 우연성들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심 문제는 내가 '우연적 필연성(contingent necessity)'이라고 부른 것으로 <자본주의와 국가(The Capitalist State, 1982)>와 1996년 <이론, 문화, 사회(Theory, Culture and Society)> 저널에 쓴 서평 논문에서 논한 것입니다. 이 두 글에서 나는 설명의 적합성은 설명대상의 구체성과 복합성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일한 개체, 사건, 과정 또는 결과가 설명대상으로서 그것이 갖는 지위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규정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실재하는 세계가 완전히 서술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것의 고유성(singularity)에 도달할 때까지 그 설명대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항상 가능합니다. 최초의 규정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명을 시작하는 지점도 달라지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적합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계에서 더 많은 요소들이 설명에 접합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설명은 특정한 추상화, 구체화, 단순성, 복합성의 수준에서 규정된 문제와 관련해서만 적합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또 다른 구체화의 층이나 또 다른 복합성의 축을 추가함으로써 하나의 적합한 설명을 흔들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특정한 설명대상으로서 설정된 것, 즉 이론적으로 적실한 용어로 번역되어진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서술은 반드시 이론적으로 적실한 용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의 용어로 말하자면, '현실적인 것(the actual)'이나 '실재하는 것(the real)'의 수준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the empirical)'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지 모릅니다. 순전히 경험적인 서술은 적합한 설명의 토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 지렛대(힘)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적합한 설명에 직면했을 때의 해법은 더 많은 경험적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론적 질문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문제들은 가끔은 해결되는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제기됨으로써 해소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더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설명대상을 상정하고 이전에 적합했던 설명이 더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다음 단계에서도 맞는지 살펴 봄으로써 설명들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이 더 구체적인 단계에서 말이 안 된다면 그 전 단계에서도 적합한 것이 아닙니다.


Q. 왜 (사후적 함의를 가지는) '선택' 대신 (사전적 함의를 가지는) '선택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A. 답은 내가 비판적 실재론자라는데 있습니다. 선택성은 실재적인 것의 수준에 있는 인과적 속성이지만, 선택은 (경향성과 반경향성이 특수한 국면에서 작동한 후의) 현실적인 것의 수준에 있는 과정이고, 선택의 결과는 경험적인 것의 수준에서 서술될 수도 있고, 현실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용어로 재규정될 수 있습니다. 선택성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잠재성의 집합으로 존재합니다. 선택은 그 잠재성 중 하나가 현실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택성이란 '사전적'이고, 선택은 '사후적'입니다. 그러나 물론 선택성은 사건 이전에나 이후에나 동등하게 실재하는 것이고, 선택은 사건 이후에만 현실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적 필연성, 즉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날 수 밖에 없지만(필연성), 이것이 일어날 수 있게끔 요구하는 단일한 인과과정은 없다는 사고의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 그 일은 여러 과정들의 우연적인 상호작용(우연성)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전략관계론의 관점에서 볼 때, 선택성들은 맹목적 진화(구조적 표류)나 계획적인 행동을 통해 변형될 수 있으며, 선택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의 전반적 논리로 회귀할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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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략적 선택성의 개념은 국가권력의 행사가 국가에 새겨진 경향적인 편향성과 충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합니까?


A.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은 도구주의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구조적 제약이나 순전한 주의주의(voluntarism)를 배격합니다. 그러한 외적으로 주어진 한계 속에서, 일련의 정책에 대해 편파적인 국가역량의 집합을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원리상 언제나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 '가능성의 기술(art of the possible)'이라고 종종 서술되는 이유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 중의 하나는 1931년 영국에서 노동당이 대공황, 특히 대금융위기 때문에 패배한 이후에 세워진 거국정부(National Government)가 취한 첫 번째 행동들 중 하나입니다. 거국정부는 파운드화를 금본위제에서 탈퇴시켰는데, 그 직전에 선거에서 패배한 노동당 정치인들은 "아무도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이는 금본위제에 대한 경로의존적 물신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그들의,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영국 기성체제 내부의 인지적 선택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위기의 강도 때문에 발생한 세력균형의 이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방식을 따라 "계속 가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혀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으로 가능했던 행위들 중에는 관련 행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지적 지평 바깥에 있기 때문에 전혀 시도조차 되지 못한 선택지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지적 선택성 (예: 정책 학습이나 정책 이전)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수 있습니다. 대처리즘의 충격 또한 또 다른 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의 희망에 대항하여 조합주의 영국을 통치할 수는 없다는 지배적인 견해에 감히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Q. 구조와 전략의 변증법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구조가 전략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하는 한편, 전략들은 (내적 관계로서의) 구조를 구체화하고 그럼으로써 구조를 재생산하고 변화시킴으로써 구조에 대응하는 것인지요?


A. '변증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실제로는 당신이 어떤 것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일면적이지 말라는 방법론적인 권고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고가 실재 세계를 분석하기 위한 일련의 약정들(protocols)로 어떻게 변환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에 있어서, 구조와 전략의 변증법은 사실은 이중적 변증법입니다. 변증법의 제1차 질서는 (1) 구조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으로 각인된 전략적 선택성과 (2) 행위자들이 전략적인 맥락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고 그것을 기초로 행위할 수 있는 역량과 관련됩니다. 이것이 장과 아비투스를 통해 작동하는 부르디외(Bourdieu) 변증법의 최대치입니다. 변증법의 제2차 질서는 (3) 주어진 구조적 앙상블이 부여하는, 차별적인 효과를 가진 구조적 제약과 기회들에 의해 설정된 한계 내에서 유효하게 작동하는 전략들이 선택적으로 보전되는 것(selective retention),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4) 전술, 동맹, 시공간적 지평, 스케일 뛰어넘기 등의 변화를 통해 이러한 제약과 기회들을 전복하거나 변형하고, 그리고 그럼으로써, 주요한 차별적 제약들과 기회들을 변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전략적으로 성찰적인 행위자들의 역량입니다. (그 자신은 결코 실제로 발전시키지 않았던) 정-반-합이라는 신비에 싸인 헤겔의 변증법의 용어로 조잡하게 표현한다면, 제2차 질서 수준에서의 변증법은 전략적으로 성찰적인 행위를 통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구조를 변형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대안적으로, 행위자들이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행동을 배우도록 전략의 레퍼토리를 선택적으로 강화함으로써 발생한 변형으로 서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변증법이 과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이, 선택, 보전(variation, selection, retention)이라는 보통의 진화 메커니즘을 통해서 오랜 시간 동안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진화 메커니즘을 구조와 전략의 변증법에 적용하면, 구조적 결합(structural coupling), 구조, 전략적 성찰성 및 전략적 조정 사이의 공진화(co-evolution), 그리고 경로의존성(물려받은 구조와 전략적 역량들)과 경로형성(구조와 역량의 변형)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블레어와 그의 내각의 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Q. 실재 사회세계에서 어떤 것이 전략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A. 이것은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가끔씩 행위자들은 진짜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as if'에 기초해 전략과 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일관된 행위의 패턴으로부터 어떤 전략과 전술이 선호되고 있는지 연역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따르는 비교적 성찰적이지 않은 세계 내 행위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행위 방식은 적합성의 논리(logic of appropriateness), 즉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적합한가에 따라 실용적인 방식으로 선택된 행위들의 레퍼토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적 행위자의 수준을 떠난다면, 다른 질문들이 등장합니다. 전략과 전술들이 얼마나 조직들이나 사회운동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가끔씩은 공적인, 준 공적인, 그리고 사적인 전략적 담론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전략적 행위의 실제 패턴과 대조해서 전략적 담론들을 체크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시간이든 회고적이든 간에, 어떻게 드러난 (또는 'as if') 전략들을 분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이 문제는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을 채택하든 않든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행위에 내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Q. 선생님은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A. 나는 전략과 전술을 포개진, 관계론적 용어들(nested, relational terms)을 통해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전략과 전술은 행위자들의 지평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맥락에서 전략과 전술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협소한 행위 지평에서는 전략이었던 것이, 더 넓은 틀에서는 전술일 수 있습니다. 이 일반적 규칙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일상생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Berkeley: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에서 도입한 전략과 전술의 구별일 것입니다. 그는 (그람시의 진지전과 유사하게) 전략이란 시간보다 공간을 사용(use of space over time)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전술은, 즉각적인 기회를 지금 여기에 만들기 위해 시간을 사용(use of time)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기회들을 장기적인 권력의 토대로 변형시킬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나의 전략/전술 구별은 일관되게 전략관계론적이지만, 그의 구분은 공간과 시간의 사용에 의존하므로 더 존재론적입니다. 언제나 약자는 전술을 사용하고 강자는 전략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약자의 전술은 다시 자신의 즉각적 이익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법에 관한 전략과 전술로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법복제 컴퓨터 소프트웨어 해커로 생존하는 것과 같은) 전술적 행동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한다고 해서 당신이 빌 게이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커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당신이 결절적 위치(nodal position)를 차지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만약 당신의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가 자본가의 연합으로서 노동조합의 힘을 분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련의 즉각적인 전술적 목표를 가지는 것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 이전의 보수당 정권에서 광부들과의 대치에 실패한 이후에 대처정부가 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드 세르토와 같은 종류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전략관계론적인] 전략-전술 구별을 회복하도록 약간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전략인 것과 전술인 것, 그리고 '마치 그런 것(as-if-ness)'들이 계속 자리를 바꿔가는 점점 더 길어지는 시간지평 위에서 전략과 전술을 함께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Q. 전략을 분명히 알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A.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탐구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분명한 전략들이 없는 것인지 묻기 바랍니다. 전략적 선택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자들도 전략적 맥락 분석을 할 수 없고 적합한 전략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전략적으로 비성찰적이고 솜씨 없는 행위자들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심오한 전략적 혼돈에 빠진 극심한 위기의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전략관계론을 사용하는 누군가가 모든 행위자가 모든 상황에서 분명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발견했다고 한다면 나는 매우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세계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무의미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분명한 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이 차별적으로 배분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포함한 단지 다른 유형의 질문들을 제기할 뿐입니다. 따라서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은 행위자들이 언제나 분명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사실 내가 기회를 찾고 있는 기업가였다면, 가장 어리숙한 사람들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이것의 한 예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은행에 대한 맹목적 신앙이 퍼지고 몇몇의 파렴치한 사람들이 폰지 사기(Ponzi scheme)에 근거해 엉터리 은행을 설립했던 구 유고슬라비아의 이행기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고객들 자신의 돈과 그 다음 번 고객들의 자본투자로부터 이자를 지급함으로써, 이 사기를 끝낼 때까지 예금을 계속 유치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일종의 전략적 비대칭성이 있었으며 이 전략적 비대칭성은 불행하게도 이 시기 전략적 게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은행에 대한 불신, 은행규제 요구, 공산주의적 과거로의 회귀 요구 등과 같이 장기적이고, 경로의존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의 발견도구(heuristic)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언제나 적합한 실질적 이론과 개념들을 사용해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이 제공하는 것은 일련의 실질적 논증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는 더욱 정교한 질문들의 집합입니다.


Kytir. 전략관계론이 비전략적 행위에 대해 가지는 함의는 무엇입니까?


A. 구조가 모든 행위자들에게 동일한 제약효과를 주면서 실재 세계에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전략적 행위자들은 전략적인 행위자들만큼 주어진 국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숙명론적인 처방이고, 예를 들면 세계화는 불가피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는 더 능수능란한 사람들에 의해 현실화될 수 있는 처방입니다. [하지만] 다른 행위자들은 세계화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또는 세계화의 전개를 어떻게 제한할 수 있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이 세계화의 행위자라고 간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거꾸로 보자면, 비전략적 행위자들은 전략적 가능성들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구조를 훨씬 더 단순하고 더욱더 구속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비전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식의 결론은 그 한계점에서 순수한 숙명론에 다다르겠지만 대부분의 행위자들은 그러한 결론에 저항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야 말로 드 세르토가 전술을 강조하면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술들로부터, 전략적이 아닐지라도 전술적 학습의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전략관계론에 대해 처음부터 내가 강조하였던 것은 행위자들이 학습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학습에 대한 학습, 의도적 학습 또는 단순히 어떤 것들이 보상을 받기 때문에 행위를 조정하게 되어 일어나는 학습 등을 통해 성찰적으로 학습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끝마치기 전에 마지막 논평을 하고 싶습니다.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이란 딱지가 비전략적인 행위와 실천들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그러한 이름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의 저작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에는 구조가 다소 선택적일 것이며, 비전략적 행위를 하는 것은 특정한 [전략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습니다. 전략관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구조와 행위들은 제게 이론적으로 덜 흥미롭습니다만, 그러한 것들도 분명히 발견될 수 있으며, 사회과학의 다른 접근들은 그것들을 다룹니다. 후자에는 민간방법론(ethnomethodology), 일상생활의 사회학, 감정의 사회학 등이 포함되며, 나는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이 이들과 더 긴밀히 교류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적합성의 논리와, 감정적 행동이 전략-관계적 맥락 분석과 행위의 사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감정의 문제를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이 만능의 이론적 틀로 취급되고, 얼마나 적합한지에 상관없이 언제나 주어진 문제의 분석에 대한 출발점(entry point)으로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출발점에 대한 전략관계론적 성찰은 몇몇 종류의 이론적 질문에 대하여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이것이 가장 적합한 출발점이라고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전략관계론적 접근법을 국가이론의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시켰고, 다음에는 더 일반적으로 정치경제학에 적용하였으며, 그리고 현재는 정치경제학과 비판적 기호학(critical semiosis)을 통합하여 비판적 실재론적이고 전략관계론적인 '문화정치경제학(cultural political economy)'을 만드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큰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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