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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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8/05 23:54 | 트랙백 | 덧글(0)
암투병 소아마비 수필가 장영희 교수 별세
http://www.donga.com/fbin/output?rss=1&n=200905090227
오늘 학과 동기로부터 문자로 장영희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위를 받은 이후로 여러가지 일(강의, 연구소 일 등)로 계속 심적 여유가 없었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언제 내가 번역했던 책(<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인문학 스터디> 등)을 들고 찾아뵈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병원에서 투병중이셨던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2년 전쯤에 학교에서 멀리 목발 짚고 걸어가시는 선생님 모습을, 인사도 차마 못하고 멀리서 본게 그 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되고 말았다. 다소 숫기 없는 나로서는 대학 4년 (그러니까 사회학과에서 복수전공을 하기전 영문과 학생이었던 기간) 동안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을 뿐만 아니라, (영어로든 국어로든) 내 글쓰기의 틀을 잡아주신,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베스트 티쳐셨는데, 학위 받고 귀국하고 시간도 꽤 지났건만 게으름탓에 한번 찾아 뵙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나쁜 학생이 되고 말았다.
기억을 돌이켜 보건대, 나는 장영희 교수님에게 다음의 세 과목을 들었다. 고급영작문 (1992년 1학기), 논문작성법 (1992년 2학기), 20세기 미국소설 (1993년 2학기).
영문과 2학년의 고급영작문과 논문작성법은 매우 어려운 난코스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장영희 선생님 반이 제일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두 과목 다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도 있었지만) 수업은 당연히 영어로 진행되었다. 고급영작문의 경우에는 한 학기 동안 문학을 주제로 3-5쪽 분량의 페이퍼를 13-4번 낸 것으로 기억한다. 술 먹고 놀다 들어와서는 다음날 제출하기 위해 새벽에 술 취해서 쓴 기억을 포함해 아무튼 이 때 밤새기를 정말 밥먹듯이 했다. 뿐만 아니라 학기 말에는 저널(일기)도 써서 제출해야 했다. 물론 선생님은 모든 제출물을 읽고 논평을 해주셨다. 특히 페이퍼의 경우는 초고를 내면 수정해서 돌려주고, 두번째도 역시 일일히 수정하여 돌려주셨다. 빨간펜으로는 틀린 문법을 교정해주시고, 파란펜으로는 내용에 대한 코멘트를 달아주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면담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해 주시기도 했다.
당시 나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철학적 개념(실존주의, 절망... 등등)을 마구 남발하며 헤밍웨이의 단편 등에 문학비평을 쓰고는 했다. 설명을 달지 않은 까닭은 물론 잘 몰랐기 때문이다. 잘 모르면서도 철학으로 폼은 잡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이런 나에게 '왜' 그런지 설명하라는 지적을 하셨다. 그리고 불분명한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쓰라고도 지적을 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항상 '왜' 그런지 설명을 하려고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왜'에 너무 강박이 되는 바람에 'because'라는 말을 남발하여 학기 말쯤에는 내 글이 "하늘은 파랗다. 왜냐하면..."이라는 식으로 필요 없는데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지만, 영국에서 어느 교수로부터 영국사람들보다 더 영국적으로 쓴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 생긴 습관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선생님은 매 학기 가르친 학생들의 사진을 기념으로 찍어 두시고는 하였는데, 당시 우리 반 학생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선생님이 사진 찍을 때 포즈만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사진을 다 찍고 나자, 다른 반 학생들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고 실망을 표시했던 기억이 난다. 그제서야 몇 학생이 같이 찍자고 그랬지만 이미 삐져버리신 선생님은 같이 사진 찍기를 거부하셨었다. 나를 포함해서 참으로 철없는 학생들이었고, 그게 나한테는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아, 이 때부터 이미 나는 나쁜 학생이었던 것이다.
다음 학기에도 나는 힘들어도 배울 것이 많다고 판단하여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논문작성법>을 신청하였다. <논문작성법>에서 나는 참고문헌 찾기, 참고문헌과 각주 작성, 메모카드 작성... 등 논문작성의 전과정을 배웠다. 나는 지금 사회학 과목을 듣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이 내용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당시 키스터 신부님이 가르치시던 <영문학 형태론>이라는 과목도 듣고 있었는데, 과제로 영시를 써서 내야 했다. 내가 쓴 영시가 형편 없는 점수를 받자, 나는 등단한 시인이신 아버지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내는 꼼수를 부렸다. 그러나, 이 또한 기대했던 만큼의 점수를 받지 못했다. 아무리 번역이란 공을 들였어도 어떻든 내 글을 내지 않았으므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마땅하나, 나는 당시에 좋지 못한 점수를 받은 까닭이 박사도 아직 못 받고 문학이 뭔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시간강사가 채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도 좋은 까닭은 단지 그 시가 원래 프로가 쓴 것이라서가 아니라 장영희 선생님께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장영희 선생님께 제출한 다른 과제에 이 시가 나도 모르게 잘못 끼어들어갔는데, 선생님은 과제도 아니었지만 그 시의 멋진 글귀에 nice!라는 평을 달아주셨던 것이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내 친한 친구가 방황하면서 이 과목에 계속 들어오지 않았을 때, 선생님께 나한테 하신 말씀이다. 왜 그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오라고 하지 않냐고. 서강대는 학점의 2배 (2학점인 경우 4시간)를 초과해서 결석하면 F를 준다. 내 친구는 F를 이미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때 선생님은 아마 F를 바로 주지 않고 기다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와 친한 내게 연락해서 다시 들어오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 때 수업시간에 나를 훈계하시면서 하신 말씀, "What are friends for?" 친구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친구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말씀으로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쁜 학생일 뿐 아니라 나쁜 친구이기도 했던 셈이었다. 물론 나는 그 친구에게 계속 학교에 나오라고 연락하고, 그럼에도 그 친구는 학교에 안나왔었던 것이긴 했지만, 그 친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집에 한번 찾아가 보지도 않고 결국에는 손을 놓았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에 대해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물론 이 과목에서도 선생님은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셨다는 것이다. 이 때는 물론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과 사진 같이 찍자고 하였다. 그러나 1학기 때 이미 지적을 받아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 같아서 여전히 속이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다.

<20세기 미국소설>은 내가 장영희 선생님께 한국어로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이다. 당시 다뤘던 텍스트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윌라 캐더의 <나의 안토니아>였다. 중간고사를 보는데 마지막에 기찬 문제가 나왔다. 이 책이 왼쪽면에서 끝나는지 오른쪽 면에서 끝나는지 맞추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영문으로 다 읽지 않고 번역본에 의지하는 학생들(그래서 영어영문학과가 아니라 '국어영문학과'라는 농담도 있었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로 국어로 영문학을 읽었던 나는 시험직전에 원서의 마지막 부분을 운좋게 펼춰봤던 덕에 그 문제를 맞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수업시간에 제임스 딘 주연의 <에덴의 동쪽>과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우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를 비디오로 시청했던 기억도 나는데, 당시에는 너무나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나중에 좀 더 나이가 들고서야 영국에서 다시 한번 TV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 때서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었다. 하지만 나의 텀페이퍼는 <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것이었다. 개츠비가 미국의 실용주의적 가치관의 폐해를 지적하는 소설이라고 해석하는, 다소 야심찬 내용의 논문이었는데, 선생님은 나의 이런 도발적인 해석에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나는 장영희 선생님께 A를 받아 본 적이 없다. 항상 B+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어떤 정도의 점수인지 나는 모르겠다. 당시 서강대 기준으로는 나쁜 점수는 아니었겠지만). 나중에 나는 이 페이퍼를 고쳐서 졸업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당연히 장영희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하고 싶었지만, 당시 그 분은 영문과 교수가 아니라 교양과정부 교수였다. 그리하여 다른 교수에게 논문을 낼 수 밖에 없었다(그 분은 넉넉하게 A학점을 주셨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나서도 학교를 계속 다녔기 때문에 나와 장영희 선생님이 만날 기회가 한번 더 있었다. 1996년 말에 사회학과 대학원을 중퇴하고 영국의 석사과정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던 것이다. 추천서를 써달라면 귀찮아서 학생들더러 써오라는 교수들도 많은데, 당시 나는 운좋게도 그런 분이 한 분도 없었다. 장영희 선생님께서도 직접 그 유려한 영 문장으로 매우 후한 내용의 추천서를 써주셨다. 나는 이 추천서에서도 몇 가지 영어 표현들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내가 장영희 선생님과 교류한 것은 1999년 초가 마지막이다. 사회학 석사과정을 끝마치고 1998년 12월 나는 잠시 한국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기억에는 안나지만 당시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때도 나는 선생님께 인사를 제대로 못드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영국에 돌아가고 나서 이메일을 드린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선생님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에게 그 내용을 소개하셨다는 답장을 보내셨다(안타깝게도 그 메일은 내게 남아 있지 않다). 열심히 영작문 공부해서 나처럼 되라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내 영어실력은 선생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게으르고 악한 학생은 그 이후로 선생님을 찾아 뵙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먼 발치에서 한번 보았던 것 빼고는. 이제는 후회하고 상심해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 by | 2009/05/10 04:05 | 실험실외부 | 트랙백(5)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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