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실험실

79 10 나는 국민학교 1학년이었고, 그래서 대통령이 박정희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10 27 오후 집에서 TV에서 박정희 대통령 사망 소식을 처음 보고 다른 방에 계신 부모님께 달려가 말씀 드린 것도 나였다. 당시 집이 동작동 국립묘지 ( 국립현충원) 옆이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장례 행렬이 우리집 옆을 지나갔다. 나는 장면을 TV 보면서 뭔가 행사가 바로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들떠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물으셨다. “박정희 대통령 귀신이 지나가는데 무섭지 않니?”라고. 

당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안되었다. 도대체 귀신이 어디있다고 무서워? 그런데 어쩌다 부마항쟁의 축이었던 마산에 위치한 학교에 취직을 했고, 인연으로 결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부마항쟁에 관한 공부도 약간 하다 보니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된다.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비판 뿐만 아니라 공론 자체를 막아 버리고, 두발, 복장, 음악, 일상과 신체까지 모두 억압하고 통제했던 역사상 유례가 없는무서운독재자였다. 물론 인명 살상의 측면에서는 이승만이나 전두환이 훨씬 규모가 컸지만, 왕을 포함해 역사상 한반도에 있었던 독재자들 이런 정도로 자유를 압살하려고 이는 (김일성과 그 후손을 제외하면)  밖에 없다. 부마항쟁 당시에 부산대 학생들이우리의 소원 개사해우리의 소원은 자유라고 노래를 부른 것은 바로 때문이 아닐까?

40년전 오늘 1979 10 16 부산, 18 마산에서 시작되었던 부마민주항쟁은 그러한 자유의 회복을 위한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1960 4.19 혁명이 1961 5.16 쿠데타에 의해 최종적으로 좌절되고 군사독재가 공고화되었지만, 18년간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는 야당, 지식인, 학생에 국한되어 있었고 결코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예를 들면 박정희 정권기 최대의 반정부 운동으로 한일협상에 반대한 6.3 항쟁도 학생중심 운동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71 광주대단지 사건은 철거민이 중심이 항쟁이었지만 민주화운동과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반면에 79 부마민주항쟁은 4.19 이후 최초로 대중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을 내부에서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80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 6 항쟁에 이르는 거대한 대중적 민주화 운동을 되살린 항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마민주항쟁은 자유의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 이른바 1987 민주화로 결실을 거두고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 그리고 몇번의 정권교체와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 시기에 버금가는 수준의 자유에 대한 철저한 억압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상자유 소원할 일은 없어진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 4.19, 10.16, 5.18, 6.10이라는 국가기념일로 공식적으로 기억되는 민주화 운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지역에서조차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잊혀져 것이다. 물론 시대를 살지 않고, 지역에 살지 않는 이들이 특별히 그것을 기념해야 이유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성취한 것은 대체로 개인에 대한 외부의 간섭과 억압의 부재를 의미하는 소극적 또는 형식적 자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외부의 간섭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개인 의지와 자아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의 적극적 또는 실질적 자유는 크게 증진되지 못하였다. (관료제의 억압은 차치하고) 정치영역은 민주화되었는지 몰라도 우리가 직접 살고 체험하고 있는 경제생활의 현장은 아직도 시장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독재, 억압, 갑질이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자유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1979년에서 87년에 이르는 민주화 운동은 비단 지식인, 학생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 노동자, 빈민 등이 참여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화도 바로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엘리트의 운동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운동으로 기억되어야 하고, 그것의 결과로 우리가 지향하고 얻을 자유도 엘리트( 자본) 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 노동자, 빈민, 약자, 소수자의 자유여야 한다. 40년이 같지만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이다. 박정희의 귀신은 가버렸(다고 믿고 싶)지만, 때까지 자유의 유령은 계속 우리 주변을 떠돌 것이다.


. 예전에도 공유했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부마항쟁 관련 졸고 몇편을 다시 공유한다.


미국 정부 기밀문서를 통해본 부마항쟁 - 부마항쟁의 정치사회적 충격”, 홍순권 , <부마항쟁의 진실을 찾아서> (서울: 도서출판 삼인, 2016)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시민참여를 중심으로," 학술단체협의회 편, 안병욱, 배성인 외 공저, <5.18 민주화 운동의 국제적 비교와시민의식> (광주: 5.18 기념재단, 2014) 


https://www.academia.edu/12941787/%EB%B6%80%EB%A7%88%ED%95%AD%EC%9F%81%EA%B3%BC_%EA%B4%91%EC%A3%BC%ED%95%AD%EC%9F%81_%EC%8B%9C%EB%AF%BC%EC%B0%B8%EC%97%AC%EB%A5%BC_%EC%A4%91%EC%8B%AC%EC%9C%BC%EB%A1%9C


"유신 체제 말기의 한미 관계와 정치위기: 부마민주항쟁과 동상이몽의 정치사회학" <기억과 전망> 38 (2018)


https://www.academia.edu/37592365/%EC%9C%A0%EC%8B%A0_%EC%B2%B4%EC%A0%9C_%EB%A7%90%EA%B8%B0%EC%9D%98_%ED%95%9C%EB%AF%B8_%EA%B4%80%EA%B3%84%EC%99%80_%EC%A0%95%EC%B9%98%EC%9C%84%EA%B8%B0_%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EA%B3%BC_%EB%8F%99%EC%83%81%EC%9D%B4%EB%AA%BD%EC%9D%98_%EC%A0%95%EC%B9%98%EC%82%AC%ED%9A%8C%ED%95%99




마르크스는 공상과학이고, 현실은 베버? 봉준호의 <기생충> 실험실

마르크스는 공상과학이고, 현실은 베버? 봉준호의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동시에 유머와 서스펜스가 넘치는 영화였다. 하지만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기도 했다. 아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한 것이다. 사실 간단한 내용인데 쓰다보니 계속 뭐가 덧붙여지고 길어져서 재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가급적 읽지 마시라. 리뷰는 <기생충>, <설국열차>, <위대한 개츠비> 스포일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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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계급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설국열차>에서는 명확히 (포스트-)마르크스적 스탠스를 취했다. 단지 계급 상승이 아니라 진정한 혁명, 자본주의 계급 구조의 파괴와 그로부터의 탈주를 그렸던 것이다. 멈추어서는 안되는 열차의 엔진은 너무나 명확하게 자본주의를 상징했고, 열차 앞칸은 1세계, 포드주의, 지배이데올로기, 타락한 상류계급을 보여주었다. 단지 열차의 주인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계급 불평등의 구조는 계속되니까. 그러므로 엔진 자체를 파괴해야 했다, 그리고 열차 밖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마지막 생존자 중에 백인 남성은 없었다. 황인 여성과 흑인 남성만 있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인에게 있어 진정한 명화란 특별히 비평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메시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작품이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 일치하는 경험을 제공할 때 비평이라는 소화제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내게 그러한 요건을 100% 충족시킨 영화였다. 그래서 내게 봉준호 감독 최고의 영화는 <설국열차>이다.

그런데 <기생충> <설국열차>보다 명확하고, 약간의 해석이 필요하다(그래서 그렇게명징하게직조되어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설국열차>보다는 못한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설국열차> 마르크스적 계급 스토리는 베버적 계급 스토리로 바뀌었다. 어떤 이들은 부르디외나 베블렌을 거명할지도 모르나 나는 베버의 계층론 안에 부르디외나 베블렌이 말하는 문화적 계급투쟁이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계급은 가족을 단위로 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계급 스토리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계급 스토리가 아니다. <설국열차>에서 계급은 가족을 넘어선 집단의 스토리였다. 반면에 <기생충>에서 계급은 가족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명백히 계급을 하나의 통일된(또는 통일될 있고 그래야만 하는) 사회 집단으로 보지만 베버는 명백히 계급을 통일된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계급이란 경제적 위치일 뿐이고 반드시 어떤 집단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은 비슷한 정도의 명예와 생활양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생충> 김기택(송강호), 박동익(이선균), 그리고 가사도우미 국문광네, 이렇게 가족의 이야기이고, 경제적으로는 같은 계급인 (속임수, 사기를 통해) 기생하는 가족이 일차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한다(가족단위 서사는 개인주의 서사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경향은 ()자유주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 가족 사이에는 같은 계급의식은 커녕 똑같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연대의식도 전혀 없다. 그러기는 커녕 살기위해 서로 살인 폭력을 행사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제 이건 클리셰가 되어버린 같다, 그렇지 않나?). 경제적인 위치가 비슷하다는 외에는 유사한 점이라고는 없는 하층계급은 분열되어 있는데, 반대로 상류계급은 문화를 매개로 집단으로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동익(이선균) 가족이 즉흥적으로 마련한, 막내 아들 박다송의 생일 번개에 초대한, 역시 상류층일 (또는 베버식으로 표현하면 비슷한 생활양식과 명예를 공유하는) 지인들은 영화 대사에도 나오듯이 처음부터 준비되었던 것처럼 너무나 서로 유기적으로 어울린다.

더구나 <설국열차>의 하층민들이 노동계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한 유추가 가능했다면, 김기택(송강호) 가족은 명백히 노동계급은 아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 보기도 어렵다. 그보다는 몰락한 중산층이다. 영화가 계급에 관한 것이라면, <,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백수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몰락한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이 등장한 것은 무엇을 뜻할까? 신자유주의 이후의 중산층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보다 설득력 있고 공감을 받을 있는 계급을 설정한 것일 있다. 어떻든 한국과 같이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역사가 길지 않고, 자영업자가 많은데다가, 특히 IMF 위기 이후 부도, 폐업, 실직이 일상화된 곳에서 중산층 정체성이 남아 있는 하층계급이나 몰락한 중산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몰락한 중산층이 반지하에 사는 일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잠깐 일했던 마케팅리서치 회사에서 소비자 인터뷰를 자택 방문에서 적이 있다. 집은 반지하가 아니라 그냥 지하에 살았다. 나야 당시만 해도 무늬만 사회학도이지 사회경험이란게 별로 없어서 전혀 못느꼈는데 같이 갔던 부장님께서 집은 지하에 살지만 아주머니 말씀하시는 것부터 수준이 있어 보인다, 망한지 얼마 안된 것처럼 집에 있는 가전제품의 급이 매우 높다, 최근에 뭐가 못되었나 보다, 안타깝다, 라는 얘기를 했고, 그제서야 뒤늦게 나도 그렇구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도 아주 잠깐 구반포의 강남 신도시에 살다가, 후로 반지하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몰락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영화 처음에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 처럼 보이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내용이 궁금하면 면대면으로 물어보시라). 몰락한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모든걸 포기하고 마침내 공장까지 가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또는 김기택(송강호) 가족처럼 공장조차도 없는일할 있는 아들과 딸도 둘다 백수이다그래서 기생의 유혹을 느낄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생충> 계급 구도는 결코 마르크스적인 이분법적인 자본-노동의 대립이 아니다. 첫째, 경제적 격차나 불평등을 보여주는 자체가 마르크스적인 것은 아니다. 베버적 시각도 충분히 그러한 구도를 보여줄 있다. 베버는 계급을 시장에서의 경제적 위치, 또는 소유와 소득 기회를 포함한 삶에서의 기회의 차이로 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폭우에 완전히 잠긴 반지하와 폭우에도 멀쩡한 미제 인디안 텐트를 정원에 저택의 차이는 계급이란 삶의 기회에서의 차이라는 베버의 계급 정의에 부합한다. 하지만 베버적 계급 구도에서 착취는 없으며, 계급은 능력과 자원에 따른 서열이나 불평등일 뿐이다. 기생충에서 김기택(송강호) 집과 박동익(이선균) 집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대립할 일은 없었다. 관계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의 착취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위로의 기생만 보일 뿐이다. 오히려 경제적 갈등은 사이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저택에 기생하는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다. 박동익(이션균)네가 운전기상와 가사도우미를 해고한 것도 결국에는 김기택(송강호)네가 꾸민 일이다. 사실 어쩌면 진정한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영화의 포커스는 여기가 아니라 반지하와 저택 사이의 대조, 그리고 문화적 갈등에 놓여져 있다.

물론 <기생충>에서 경제적 차이가 삶의 기회와 생활의 차이를 낳는 것은 너무나 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베버적인 계급 묘사일 뿐이다. 사실 부분은 계급간의 삶의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는 3세계 주변부와 서구 중심부를 대조하는 것으로 보일 같기도 하다(결말에서는 저택이 유럽계 백인에게 넘어간 것을 보라). 서구에서 이런 침수 장면은 허리케인으로 침수된 미국을 제외한다면 주로 3세계 자연재해에 관한 보도에서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감정이입 없이 아주 안전한 곳에서, 전후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는 이른바자연재해 포르노라고나 할까. 내게는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임팩트가 있었고 아마도 칸에서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그러므로 <기생충> 계급 갈등은 자본-노동이 아니라 상류층과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몰락한 중산층 백수 집안 사이의 갈등이다. 반지하와 대저택의 물질적,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사이의 갈등은 상징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베버에 따르면 갈등은 경제적 차원보다는 문화적 차원, 베버가 신분status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차이에서 일어난다. 명예와 생활양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른 서로간의 멸시와 질시에서 일어난다(부르디외는 이를구별짓기라고 불렀다). 베버의 용어를 따르자면 <기생충> 그리는 것은 계급갈등이라기 보다는 신분 갈등이다. 그러나 이것도 계층갈등임에는 분명하고, 계급이라는 개념이 베버가 정의하는대로 경제적인 것만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최근의 사회학에서는 문화적 영역에서의 계층갈등을 계급갈등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이것도 계급갈등이라고 하자. 물론 신분갈등이든 문화적 갈등이든 이렇게 계급 갈등을 그리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갈등은 상징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경제보다 그게 훨씬 중요한 이슈일 있다. 더구나 마르크스의 시대와 달리 신중간계급이 형성되고 나중에는 조직화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유연 축적체제로 전환되면서 계급의 구성과 갈등은 다차원적으로 변화하였다. 김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이기에 어느 정도의 문화적 소양 (또는 부르디외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문화자본) 있다. 어느 정도의 교양, 그리고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국내외 명문대생 연기를 감쪽같이 있다. 베테랑 운전기사 역할도, 그리고 교양있는 가사도우미 역할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중상층으로서의 자존감 또한 약간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선을 넘는 ”, 상징적 위계에 도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게다가반지하의육화된 냄새는 어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냄새 자체가 아니라 냄새가 난다는 지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다. 아마 김기택(송강호) 본래 하층계급이었다면 그러한 멸시가 기분 나쁘긴 하지만 익숙해져 그냥 참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몰락한 중산층이었으므로 멸시를 끝내 견디지 못한 같다.

그래서 <기생충> 그리는 불평등은 경제적일지라도, 그것이 그리는 계급 갈등은 경제적 갈등이 아니라 상징적, 문화적 갈등이다. 영화 속에서 박동익(이선균) 가족은 악덕 자본가도 아니고 때로 역겹고 타락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특별히 위선적이지도 않으며, 가정교사,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를 특별히 착취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보기에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을 다소 불결하게 본다 또는 멸시한다, 그리고 조금 잘난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도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자본주의에서의 불평등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본가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없다. 그리고 그냥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과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기택(송강호) 뜬금 없이 오근세한테서 냄새난다는 (실제로 영화 속의 상황에서 악취가 났을 것이다) 마디에 뚜껑이 열려 박동익(이선균) 죽인다. 정작 기택(송강호) 가족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아들을 거의 죽일 뻔하고 딸을 끝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오근세( 가사도우미의 남편)인데 말이다. 기생이라는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하층 계급내 폭력이 갑자기 상징적, 문화적 갈등에 의해 촉발된, 계급간 폭력이 되어버린다.

김기택(송강호) 갑자기 오근세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거나 박동익(이선균)에게 적대감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둔감해선지는 몰라도 그럴 정도로 김기택(송강호) 박동익(이선균) 은근한 차별적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모멸감을 느꼈는지 드러나지 않는 같다.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재산을 다 날려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일까? 체육관 대피소의 너무나 평온한 모습은 충격을 애써 감춘 것이었을까? 아무튼 아무리 적대감이 생겼다고 해도, 겨우 마디 정도로 사람이 죽고 하나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야 하는가? 혹시 김기택(송강호) 가족이 과거에 멸시가 섞인 한마디에 풍비박산났던 것이라면 이러한 결말이 이해가 수도 있겠지만, 영화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는 없다. 혹시 다른 계급에 대한 멸시는 무엇이라도 정도의 죄악이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는가? 아니면 하층계급의 분노가 이렇게 크고 예측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도 갑작스레 당할 있으니 자본가 계급은 조심하라는 것인가—“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또는 결국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계급내 갈등이 아니라 계급간 투쟁이라는 것인가? 어떻든 영화는 김기택(송강호) 그래야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심리적, 사회적 설명이나, 그러한 행동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비판 없이 그냥 다짜고짜 (자본가이긴 하나 딱히 자본가로서 그려진 것도 아닌) 상류층 남자를 죽여버리고 살인자는 지하로 숨어 버린다.

이것은 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같다. 박동익(이선균) 죽음은 별로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쁘지는 않지만 불평등 위계에서 강자이기 때문에 죽어도 별로 동정할 만한 부분이 없게 느껴진다. 반면에 그가 짓지도 않은 죗값을 대신 치러버리는 바람에 비극을 초래한 다른 비극은 가려진다. 뭔가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국문광, 오근세의 죽음은 임팩트가 별로 없고 동정심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김기택(송강호) 가족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것은 딸 기정, 즉 여성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지하에 갇힌 아버지, 그리고 그를 구하겠다는 아들이라는 서사에 의해 가려진다. 더구나 앞서 말했지만 비극의 원인 또한 은폐된다. 영화에서 본래 비극은 사실 김기택(송강호)네와 가사도우미 가족의 갈등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초래한 것은 경쟁적으로 기생하지 않으면 없게 그네들의 형편, 그리고 그런 형편을 만들어낸,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것은 모두 박동익(이선균) 가족하고는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이다(차라리 이들을 정말 악랄하게 그렸다면…). 특히 후자는 영화에서 일부 묘사되고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비극의 궁극적 원인은 설명되지 않고 은폐된다. 따라서 영화는명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관객에게 위험한 메시지를 있다. 자본가는 무조건 나쁘다거나 (하지만 개인과 구조는 구별해야 한다), 노동계급이나 하층계급은 정말로 불결하다거나 위험하다거나, 자신의 책임은 외면하고 욕망에 가득차 있다거나 등등.

이러한 결말은 F. Scott Fitzgerald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결말과 비교될 있다. <위대한 개츠비> 어떻게 보면 한편으로는 개천용(?)—이번에는 몰락한 중산층이 아니라 아마도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놀라운 계층 상승에 성공한 개츠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수저 데이지와 남편 뷰캐넌 사이에 있는 문화적 계급 갈등으로 읽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게 되면 은폐 되는 것은 <기생충> 유사하게 -데이지 뷰캐넌 가족과 톰의 정부 머틀 윌슨, 그리고 톰의 자동차를 정비해주는 정비소 주인 조지 윌슨의 관계이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 <기생충>보다 위대한 것은 개츠비의 욕망이 김기택의 욕망보다 순수하다거나, 개츠비의 범죄가 김기택의 범죄보다 가볍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 결말에서 유한계급 톰과 데이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개츠비를 죽이는데 있다. 톰은 자본주의적 착취exploitation 아니지만 명백히 머틀을 성적으로 착취(이용)하고, 그리고 그의 남편도 정신적, 경제적으로 착취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연적 개츠비를 죽이는데 이용한다. 개츠비를 죽이고 조지는 자살한다. 결국 유한계급 자본가들이 사회의 하층계급을 이용하고 파멸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이 부주의careless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선”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도리어 개츠비는 위대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 이제 고전이 되었고 이러한 계급 스토리는 클리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클리셰를 탈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이 자본가를 죽이게 하고, 2명이나 죽인 살인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대신 지하에 갇혀 죄값을 치르게 한다고 해서 특별한 카타르시스가 생기는 같지도 않다. 오히려 관객은 이유는 명확히 없지만 김기택(송강호)네를 동정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기생충> 어쩌면 관객이 주인공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인식하고 거리를 두게 만드는 소격효과를 의도했으나 실제로는 관객이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게 만든 브레히트의 실패한 서사극에 비견될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기생충>에서 김기우(아들) 아버지 김기택(송강호) 구하기 위해 부자가 것을 결심한다. <설국열차>에서 그려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구조의 파괴와 혁명은 영화장르가 공상과학이었으니 가능했던 셈이다. 한국적 현실을 배경으로 블랙코미디-스릴러에서는 개별적으로 부자가 되는 외에는 탈출구가 없다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탈출구도 아니다. 베버는 탈출구가 없는 이러한 현실, “the tremendous cosmos of the modern economic order”철장(iron cage)” 비유했다. 김기우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고 현실은 여전한 반지하 집이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계획이 있든 없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하실 바깥을 향한 모르스 부호 신호는 허망하고 부질없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설국열차>에서도, <기생충>에서도남궁씨들은 계급갈등과 비극의 현장을 떠나려고 한다. 전자에는 떠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후자에서는 실제로 떠나버렸다. 성공한 건축가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떠나 버렸으나, 반대로 김기우는 성공해도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꿈을 꾸는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 지금의 현실에 탈출구는 없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울하게 봉준호 감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 <설국열차>, <옥자>에서 봉준호는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남겼지만, <기생충> 그러한 희망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살인의 추억>으로 회귀한 것일까? 그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라고 해도 나는 그를 비난할 없을 같다. 누가 그러한 희망을 쉽게 말할 있겠는가. 그러나 봉준호에게 황금종려상을 영화제는 비난할 있을 같다. 하층계급의 행태와 분노를 무섭지만 기괴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계급 상승을 수는 있어도 계급 불평등의 구조 자체는 어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영화를 보고 안도한 것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주형 / 경남대 사회학과)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현실"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실험실

지주형,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현실”, <경제와 사회> 104 (2014년 겨울), 14-55.

https://dl.dropboxusercontent.com/u/17704840/%EC%A7%80%EC%A3%BC%ED%98%95%20-%20%EC%84%B8%EC%9B%94%ED%98%B8_%EC%B0%B8%EC%82%AC%EC%9D%98_%EC%A0%95%EC%B9%98%EC%82%AC%ED%9A%8C%ED%95%99%20%5B%EA%B2%BD%EC%A0%9C%EC%99%80%EC%82%AC%ED%9A%8C104%202014%5D.pdf

 

이재훈, “서해훼리호와 세월호 사이 21한국엔 무슨 일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1892.html?recopick=5

 

백승연,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 때문인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73801.html

 

백승연 씨가 필자의 논문에 대해 간략한 비판을 한겨레 신문에 투고했다. 오해와 무지로 가득한 글이다.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다고 자신이 그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여러 번 반추해보지 않고 떠오른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백승연 씨의 글은 바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사회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는 시비가 자주 붙기 마련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듯이 그들의 분석대상이 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귀 뿐만 아니라 혀가 있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혀가 똑같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백승연 씨의 글은 사회과학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이 얼마나 잘못된 논리를 전개해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는 글을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학자가 그러한 글에 반드시 응답할 이유는 없다. 무사는 덤벼드는 시정잡배에 함부로 칼을 휘두르기 보다는 피해가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필자도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사가 시정잡배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 참을 만큼 성인군자가 되지는 못한다. 특히 주변 지인들이 여럿 백승연 씨 글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니 해명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백승연 씨에게 응답하는데 있지 않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그의 글을 읽고서 필자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시켰다거나 비정규직 신분을 책임감 부재와 잘못 연관지었다고 오해할 분들, 특히 학문에 몸을 담그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지인들에게 필요시 보여주는데 있다. 경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읽기에 까다로울 것이다.

 

1. 백승연 씨의 비판과 그에 대한 간단한 답변

 

먼저 백승연 씨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겠다.

 

지 교수는 세월호 승무원 대다수가 단기계약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비정규직 선원과 선장한테는 애초부터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이라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비정규직이 직장 충성도가 낮을지는 모르나 직업윤리가 낮아야 할 이유는 없다. 뛰어난 직업윤리를 보여준 이가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정규직 노동자가 무책임 했다는 것은 비정규직/정규직과 직업윤리 또는 책임성은 무관하다는 증거이다.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선원과 선장들의 무책임함은 그들의 직업윤리 부재에서 유래한 것이지, 고용조건에 따른 직장충성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네덜란드나 미국의 예에서처럼 신자유주의 정부라도 능력이 있다면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는 동시에 적절한 조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 치졸한 행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적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대처 과정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것은 근거나 논리가 엉성하다.

 

그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 그럴 듯하다. 물론 필자의 논문이 완벽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백승연 씨가 주로 이의를 제기한 부분, 즉 비정규직 신분이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필자만의 견해가 아니며 필자가 논문에서 해당 부분의 근거로 사용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협의회의 견해이기도 하다. 필자 개인이라면 몰라도 그가 비판하는 변호사들을 포함한 진보진영의 논리가 그렇게 허술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뜯어보면 백승연 씨의 주장은 겉보기와 달리 대부분 잘못되었다. 백승연 씨의 주장은 필자의 주장에 대한 1) 오해와 2) 어설픈 사회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있다.

 

2. 백승연 씨의 불성실한 독해

 

백승연 씨의 주장은 필자의 논문에 대한 불성실한 독해에 근거해 있다. 첫째, 백승연 씨는 글의 마지막에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논변은 정부와 해경의 무능을 질타하며 정부의 축소와 시장의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과 방향만 다를 뿐 근거가 엉성하다는 점에서 논리의 수준은 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논변을 전개하지 않았다.

 

첫째, 필자의 논문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논문이 아니다. 논문의 포인트는 (지금 보니 오해를 초래할 부분, 즉 불명확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세월호 참사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일어났다는, 너무나 흔한, 별로 논문으로 쓸만한 가치도 없는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인트는 그것을 전제한 후에 세월호 참사의 정치화는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사회 퇴보에 대한 인식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에 있었다. 그 때문에 논문의 제목은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현실이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세월호 참사의 연관관계를 충분하고 자세하게 논증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논증할 수 있었다면 백승연 씨와 같은 이의가 제기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의 이의 제기는 일차적으로 필자가 쓴 논문의 목적에 대한 오독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그렇다면 논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실제로 논문 앞에서 쓴 말은 다음과 같다.

 

서해훼리호 침몰과 같은 다른 재난사고와 달리 세월호 참사가 이렇게 예외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발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 필자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세월호 참사의 전모를 밝히거나 세월호 유가족의 시위와 요구의 전개 및 그에 대한 사회적 지지의 확산을 낳은 사회운동의 동학을 밝히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서해훼리호 침몰 등 다른 참사들과 구별되는 세월호 참사의 예외적 정치화로부터 현재 우리 사회의 좌표를 읽는데 있다.

 

더구나 위에 보이듯이, 필자가 세월호 참사의 중요한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원인이라고는 어디서도 주장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화가 세월호 참사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논문의 목적은 세월호 참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순화한 것은 오히려 필자의 논문을 곡해한 백승연 씨이다.

 

둘째, 필자는 논문 어디에서도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도 치졸한 행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적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필자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이념적 프로젝트로만 국한해 쓰지 않으며,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프로젝트가 정부와 대통령의 무책임함을 조장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획"이라니! 논문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러한 함의를 가진 부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백승연 씨 자신의 얄팍한 신자유주의 이해에 바탕한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무책임함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문제를 다룬 논문(필자는 그 논문을 인용했다)이 이미 있기에 논문에 특별히 설명을 더 하지 않았지만 이 글의 뒷 부분에서 내 나름대로 추가설명을 덧붙이려고 한다.

 

셋째, 백승연 씨는 높은 직장충성도가 반드시 직업윤리를 담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요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선원과 선장들의 무책임함은 그들의 직업윤리 부재에서 유래한 것이지, 고용조건에 따른 직장충성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필자가 논문에서 비정규직 --> 낮은 직장 충성도 --> 직업윤리 부재로 설명을 전개한 것처럼 주장한다. 직장 충성도가 높아도 직업윤리가 부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옳지만 필자는 논문 그 어디에서도 비정규직의 직업윤리 부재가 낮은 직장 충성도에 기인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심각한 오독이다. 뒤에 보겠지만 필자는 다른 식으로 비정규직과 책임감 부재를 연관 짓는다. 낮은 직장 충성도와 직업윤리 부재를 연결시킬 수 없다는 백승연씨의 비판은 비정규직과 책임감 부재를 연관 짓는 여러 설명 중 하나의 설명에 대한 비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만으로는 비정규직이 책임감이 낮다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3. 백승연 씨의 아마추어 사회학과 철학

 

백승연 씨의 주장은 철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 허술한 토대 위에 서 있다. 비정규직이라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주장은, 그것에 대한 논거가 논문에서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것일 수는 있어도, 곧바로 논리적 비약인 것은 아니다. 백승연 씨가 이 주장이 논리적 비약이라고 보는 까닭은, 비정규직과 직업윤리는 무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정규직이 무책임하고 비정규직이 책임감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로 뒷받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비정규직의 낮은 직업 충성도가 아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적시하지 않은, 그러나 비정규직 탓은 아닌) 직업윤리 부재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정규직이 무책임하고 비정규직이 책임감 있게 행동했다는 사실로부터 비정규직과 직업윤리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야 말로 논리적 비약이다. 더구나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그들의 낮은 직업윤리로 설명하는 것은 동어 반복에 가깝다. 직업윤리 부재란 곧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

 

우선 비정규직이 직업윤리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그러한 반례로 간단히 반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순진한 형태의 실증주의적 반증주의이다. 일례로 백승연 씨는 정규직이냐 아니냐가 직장 충성도에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규직이어도 충성도가 낮은 경우, 비정규직이어도 충성도가 높은 반례는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백승연 씨는 비정규직이 직업윤리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제는 반박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비정규직이 직장 충성도를 낮춘다는 명제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나의 명제를 간단한 반례로 반박할 수 있다는 것만큼 순진한 과학철학은 없다.

 

다음으로 백승연 씨는 사회학적 설명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사회학적 설명은 개인의 행동이나 윤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사회학적 설명은 개개인의 행동이나 윤리를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개개인의 윤리는 애초에 구조적 변수로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회학적 설명은 개인의 행동이나 윤리 등을 설명하는 대신 개인들과 구별되는 집합적 현상(뒤르케임의 표현을 따르면, 개인적 사실이 아닌 사회적 사실’)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집단의 행동이나 윤리의 패턴이나 추세를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행동이나 윤리에 대한 몇 가지 반례는 사회학적 설명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다.

 

비정규직이어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사회학적 명제로서, ‘모든 비정규직은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다거나 모든 정규직은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명제와 동치가 아니다. 그것은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집단은 책임감이 낮은 경향을 보일 것이라는 명제이다. 이러한 명제를 몇 가지의 반례만으로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서 본 것은 주로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 이것이 왜 논리적 비약인가? 직업형태가 직업윤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닐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 선원들의 무책임함이 낮은 직장 충성도보다는 직업윤리 부재 때문이라는 백승연 씨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무책임을 직업윤리 부재로 설명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러한 직업윤리 부재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백승연 씨는 설명하지 않는다. 즉 그는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집단은 책임감이 낮은 경향을 보일 것이라는 사회학적 명제에 대해 충분한 반례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세월호 선원들이 보인 무책임함을 비정규직이 아닌 다른 보다 강력한 원인에 의해 설명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무책임과 직업윤리의 부재가 비정규직과 무관하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전혀 반박 증거가 될 수 없는 개인적 반례 외에는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집단은 왜 책임감이 낮은 경향을 보일까? 적어도 필자는 앞서 설명했듯이 어디서도 백승연 씨가 비판하는 설명방식, 비정규직 --> 낮은 직장 충성도 --> 직업윤리 부재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필자가 생각하는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정규직에게 부여되는 권한과 책임은 정규직보다 작다. 따라서 집합적 수준에서책임감을 키우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책임감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세월호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사고가 났을 때 승객 대피보다 본사와의 연락에 더 신경 썼던 이유이다. 더구나 문제가 책임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이 되면 그것은 더욱더 집합적 수준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필자가 논문에 쓴 문장을 인용한다.


그들이 이렇게 무책임했던 것은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월급 270만 원에 1년 계약직이었던 선장뿐만 아니라 갑판부와 기관부 선원 17명 가운데 12명이 4개월에서 12개월짜리 단기 계약직이었고 임금도 다른 해운사에 비해 20~30퍼센트 정도 적었다. 이에 따라 선원들의 높은 소속감과 책임감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게다가 그들은 제대로 된 안전 교육과 해양사고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민변, 2014: 27, 155~160). 안내방송을 담당한 승무원은 선박 사고시의 탈출 요령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930분경 선장과 다른 선원들이 탈출하여 더 이상 지시가 없었는데도 고지식하게 배가 80~90도로 기운 10시경까지 대기하라는 방송을 계속해 참사를 키웠다(서울신문,2014.5.10.).

 

첫 문장을 보면 필자가 선원들의 무책임함이 비정규직 때문인 것만으로 단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석이 있다라는 것은 그러한 해석이 있으며 기껏해야 그것에 일리가 있다는 뜻이지 그것을 유일무이한 원인으로 파악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음 문장들을 보면 백승연 씨가 필자의 논문을 곡해했다는 것이 더 잘 드러난다. 무책임한 행동의 원인에는 단지 비정규직이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안전교육이나 해양사고 훈련의 결여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행동은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생각이나 감정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실제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비정규직 문제는 세월호 참사의 중요한 원인이 된 신자유주의의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현실에는 비정규직, 그리고 그것이 낳은 낮은 직업윤리와 책임감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부족이 포함된다.

 

백승연 씨는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의문 또한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주장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오히려 비윤리적인 비정규직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 그 반대로 그들을 차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비정규직에게 높은 책임감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집단에 대한 사회학적인 인과적 설명과 개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정규직으로 신자유주의의 각자도생을 체화한 그들에게는 일에 대한 책임도, 승객들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물론 최소한의 도리도 하지 않은 그들에게 그들의 무책임이 교육과 훈련부족 때문이라는 면죄부를 줄 필요는 없다).

 

물론 이 문장에는 그들의 무책임이 교육과 훈련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오해될 소지가 약간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의 무책임이 교육과 훈련부족 때문이라는 면죄부를 줄이 아니라 그들의 무책임이 상당부분 교육과 훈련부족에 기인하지만 그렇다고 면죄부를 줄이라고 썼어야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반면 백승연 씨가 우려하는 것과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비정규직에서 발견되는 무책임한 경향성은 차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승연 씨는 만약 비정규직이 무책임하다고 판명되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정당하다고 볼 것인가? 비정규직 차별은 책임/무책임과는 독립된 문제이다.

 

끝으로 네덜란드나 미국과의 비교에 대해 언급하겠다. 백승연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 같다. 네덜란드나 미국이 한국과 동일한 신자유주의이지만 세월호 참사와 같은 어설픈 대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처에 대한 원인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어설픈 비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의 원인은 다양한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사건 A의 원인이 A‘이 아니라고 해서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 A의 원인이 A’가 아니라고 볼 근거는 없다. 또한 다른 곳에서 원인 A‘가 있었지만 사건 A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A’가 사건 A의 원인이 아니라고 입증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한두 가지 사례로 반증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A’의 작동을 방해하는 B라는 요인이 있을 경우 A’A라는 사건을 결과하지 않을 수도 있다(~A). 간단히 말해 네덜란드나 미국도 신자유주의인데 한국과 다르게 사고에 대한 처리와 대응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자유주의가 세월호 참사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정부(A')라도 능력(B)이 있다면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는 동시에 적절한 조처(~A)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백승연 씨의 주장은 신자유주의 정부(A)인데  능력이 없다(~B)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것(A)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논문에서 필자의 논지는 바로 세월호 참사를 낳은 무능력의 근원에는 구조작업의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외주화가 있었다는 것이었다(A' --> ~B --> A). 백승연씨는 논문의 기본 논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을 한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미국 정부는 더 잘 했을 것이라는 것은 가정일 뿐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그런 가정을 하기 보다는 미국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가 어떻게 일어나고 처리되었는지 살펴 보는게 더 좋을 듯 하다. 미국의 카트리나 참사는 이후 재난대비와 방지 대책의 측면에서 한국과 다르게 매우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만, 그 이외의 측면에서는 재난의 인재로서의 성격과 정부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세월호 보다 더 심했다는 평가까지 보인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많은 이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들고 있다. 물론 카트리나 참사를 두고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하지만 이로써 분명한 것은 백승연 씨의 생각대로 미국이라면 어땠을까라고 가설적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와 신자유주의의 연관이 자동적으로 반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질문으로부터 미국이라면 달랐을 것이다라는 답을 내리고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와 세월호 참사의 연관은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백승연 씨에 의하면 필자가 채택했다는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 치졸한 행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적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먼저 앞에서 설명했듯이 필자는 논문 어디에서도 그런 관점을 채택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면 정부와 대통령의 한심하고 치졸한 행동을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필자가 논문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서 간략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내가 사용하는 신자유주의 개념은 경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를 포함한 총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신자유주의는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금융화, 유연화, 사영화 등)에 걸맞는 정치체제와 권력관계를 동반한다. 이는 최근에 종종 포스트 민주주의권위적 국가주의등으로 개념화되고는 한다. 이는 금융자본, 초국적 자본을 포함한 기업의 권력 강화로 국가가 포획되는 동시에, 노동계급의 약화 및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족주의의 확산, 그리고 그에 따른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와해와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 물론 특정한 지도자와 정부는 상대적으로 더 무책임하고 한심하고 치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감히 그럴 수 있는 것은 결국에는 국가와 정치체제가 신자유주의(기업권력 강화와 개인주의/가족주의 확대)가 만들어낸 비민주적인 사회권력 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즉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함은 이념적 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낳은 직접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성공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근거가 엉성한 것은 필자의 논변이 아니라 백승연 씨의 논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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