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의 권위적 배분과 민주주의

1. "진보라는 사람들의 주특기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항상 '가치관과 철학이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뭐냐고 물어보면 기껏해야 3분이면 끝나는 얘기들이다. 민주주의 하자, 같이 잘살자 이 정도다."


2, "경제정책은 결국 정치에서 결정난다. 정치를 바꿔야 한다. '무슨 경제연구소가 정치 얘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를 바꿔야 하고, 그 근본은 정치변화다. [...]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 잠재력을 자생적으로 키워나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위 말은 김광수경제연구소 소장이 최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은 자칭 진보세력의 무능력을 꼬집고 있고, 2는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나라면 위 말들을 김광수 소장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로 말하고 싶다. 간단히 말해 1은 진보세력의 무능력이 아니라 진보세력이 실제로 민주주의가 뭔지 모른다는 뜻으로, 2는 정치가 경제의 선행조건이 아니라, 언제나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이다. 


이를 위해서 2로부터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2는 경제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정치가 먼저 바뀜으로써 국가가 바뀌고 경제정책이 바뀌고 그에 따라 경제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경제시스템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잠재력을 자생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일단 경제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면 그 다음에 정치는 가급적 뒤로 물러나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을 받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시장에 자원배분을 맡겨야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아닌 시장에 자원배분을 맡겨야 한다. 국가가 자원배분을 맡기면 효율성이 떨어지고 왜곡이 생긴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무슨 일만 터지면 정부의 개입을 촉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은행에 대한 정부의 개입, 은행에 대한 정부의 개입 등이 모두 단순히 '관치'가 되고 시장을 왜곡하는 것으로 일반화되는 정신분열적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정치는 필요할 때 나타났다가 필요없고 해가 될 때 사라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이 과연 효율적인가에 대해서도 수많은 문제제기가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정치--모두가 영향을 받는 공동의 문제에 관한 공동의 의사결정 과정--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는 한 언제나 있는 것이며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에 정치가 부재하는 상황을 바라고 또 가정하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이다. 먹고 입고 사는 것, 그리고 돈 버는 것 모두에 공동체의 결정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한국의 경제사에서 몇푼 안되던 논밭의 가치가 하루 아침에 폭등했던 것이 시장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개발정책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 한 이렇게 정부정책이 임의로 화폐자원을 배분한다는 이유만으로 개발정책 전체를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국토개발정책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제는 경제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모든 정치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할 수 밖에 없는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인 것이다.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란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이 아니라 권위적인 자원 배분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따라서 정치가 상존할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 주요한 자원들이 시장에 의해 배분되기 보다는 정치적 과정에 의해, 즉 이스턴의 규정대로 권위적으로 배분된다면, 이 권위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현대 한국의 사회와 경제를 지배하는 권위는 자본과 '전문지식'에 있다. 오해를 없게 하기 위해 먼저 자본의 결정(예: 대기업에 의한 생산량과 가격 결정)과 시장의 결정(시장에서의 경쟁적 가격결정)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전자는 물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배워온 바와 같이 그것을 후자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지배적인 권위의 원천은 국가와 결탁한 전문지식에 있다. 즉 그러한 것을 소유했다고 자임하고 또 국가에 의해 공인되는 이들이 경제를 좌지우지할 힘을 가진다. 그들은 경제관료(재경부, 금융위), 금융경제전문가(연구소, 증권사 애널리스트), 그리고 경제과정의 합법성과 위법성을 판단할 수 있는 법률전문가들(사법부와 법무법인들)이다. 재경부와 금융위의 정책결정은 직접적으로 여러분들의 세금의 사용처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통장잔고, 그리고 다시 국가에 내는 세금의 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금융경제전문가들은 사회의 경제자원의 흐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법률가들 또한 대기업가들을 선처하거나 기업인수합병에 개입함으로써 그러한 과정에서 일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적 배분 과정에서 자본과 전문지식인들은 서로 연대하고 협력한다. 그리고  물론 이들은 자원배분을 권위적으로만 하는게 아니라  공평하게도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불평등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참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평등이란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는 '국익'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과 자신들의 소속집단에 유리하게 자원을 배분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게 다른 이들에게도 유리하다고 착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명백하게 서로 금전을 주고 받으며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기도 하다. 요약하면 한국의 경제는 자본과 전문가들에 의해 사회적 제자원이 권위적이고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전형적인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원의 권위적 배분에 있어 권위의 원천이 자본, 전문지식 등에 있어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예를 들면 지도자의 개인적 카리스마, 도덕성, 종교, 또는 민주주의 등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세속화되고 탈주술화된 사회에서 지도자의 개인적 카리스마, 도덕성, 종교와 같은 것들이 대안이 되기는 어려운 반면, 민주주의는 대놓고 폄하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그러니 권위의 원천으로서 자본과 전문지식에 대한 유력한 대안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임에 틀림없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공동체 의사결정의 방식으로써 당연히 사회적 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을 초래한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를 포함해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여기서 경제적 자원은 마치 예외인 듯이 취급한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맹신, 그리고 과거의 권위주의적이었던 국가개입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다. 그런데 보수우파나 자유주의 우파가 경제적 자원을 제외하는 것은 일관성이라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 기득권이나 소유권이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말한다. 자유와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우선인 것이다. 그들은 민주적 자원배분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르고 시장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지만, 정작 자신들이야 말로 다른 수단을 통한 권위적 자원배분을 통해 가장 반시장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들과 기본적으로 똑같은 민주주의 틀을 유지하면서,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에 이른바 취약계층을 위한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이나 배분정책을 결합하는 이들이 어떻게 이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과 같이 정말 '민주주의 하자'는 식으로 3분 밖에 이야기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속을 뒤집어 보면 사실은 민주주의자가 아닌(=진보를 가장한 보수이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무능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먼저 원칙이 제대로 서지 않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한국에서 이른바 민주세력이 집권했다는 10년 동안에도 (물론 초기에는 IMF라는 제약이 있었고 후기에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민주적 자원 배분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직업 정치인들은 몇년 마다 한번씩 있는 선거에서의 득표를 통해 공직에 선출되나, 여당이든 야당이든 자신의 공직 유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선출 이후 대개는 민의나 신의를 무시하고 경제정책 또는 경제와 유관한 정책을 만들어내거나 승인한다. 이들은 자본과 전문지식인들과 결탁하면서 그들 집단에는 특혜를 주면서 다른 집단에 대한 자원배분에는 언제나 '시장' 운운하면서 조심스럽다. 예를 들면, (관료들에게 말린 측면도 있지만) IMF 위기 때처럼 부실기업에는 공적자금 백몇십조를 투입(일례로 제일은행 뉴브리지에 팔면서 17조 투입)하면서 실업자들에게는 10조도 쓰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고민은 민주적인 자원 배분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실질화--형식적인 선거가 아닌 실질적인 국민주권의 행사--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열거했듯이 자원을 배분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으며, 현실적으로 그 중에서 시장은 기껏해야 일부분만을 차지하며 대부분은 권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적으로 어느 한 가지 방식(예: 시장, 전문지식, 민주주의 등)만이 지배하게 하려고 한다거나 반대로 특정한 방식을 무조건 배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원을 어느 한가지 방식에 의해서만 배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을 국가 관료나 시장에 맡기려고 해도 계획이나 시장을 벗어나는 자원배분은 생기게 마련일 뿐 아니라 이러한 유토피아적 시도는 폴라니가 보여준 대로 엄청난 재앙을 낳을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예를 들면 시장이나 전문지식을 완전히 배제한 민주주의 유토피아 또한 또 다른 재앙을 결과할 수 있다.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국가계획경제, 시장유토피아, 민주주의 유토피아 등을 국가계획, 시장, 민주주의과 동일시 해서 이들을 통째로 다 배제하려고 하는 것도 재앙을 낳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또한 또 하나의 유토피아 기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약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다른 여러 가지 권위(자본, 전문지식, 직업정치인 등)와 시장기제를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가장 우위에 서고 지배적이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자원배분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라는 대원칙 하에서 시장, 전문지식, 민주주의 등에 적절한 자리와 역할을 찾아주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by pepe | 2010/02/03 01:06 | 실험실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트위터

트위터를 사용중이라는 것을 알려야 될 것 같군요.
거기도 별 건 없습니다만 ^^;;;

by pepe | 2009/08/05 23:54 | 트랙백 | 덧글(0)

장영희 선생님에 대한 추억

암투병 소아마비 수필가 장영희 교수 별세

http://www.donga.com/fbin/output?rss=1&n=200905090227


오늘 학과 동기로부터 문자로 장영희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위를 받은 이후로 여러가지 일(강의, 연구소 일 등)로 계속 심적 여유가 없었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언제 내가 번역했던 책(<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인문학 스터디> 등)을 들고 찾아뵈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병원에서 투병중이셨던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2년 전쯤에 학교에서 멀리 목발 짚고 걸어가시는 선생님 모습을, 인사도 차마 못하고 멀리서 본게 그 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되고 말았다. 다소 숫기 없는 나로서는 대학 4년 (그러니까 사회학과에서 복수전공을 하기전 영문과 학생이었던 기간) 동안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을 뿐만 아니라, (영어로든 국어로든) 내 글쓰기의 틀을 잡아주신,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베스트 티쳐셨는데, 학위 받고 귀국하고 시간도 꽤 지났건만 게으름탓에 한번 찾아 뵙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나쁜 학생이 되고 말았다.


기억을 돌이켜 보건대, 나는 장영희 교수님에게 다음의 세 과목을 들었다. 고급영작문 (1992년 1학기), 논문작성법 (1992년 2학기), 20세기 미국소설 (1993년 2학기). 


영문과 2학년의 고급영작문과 논문작성법은 매우 어려운 난코스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장영희 선생님 반이 제일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두 과목 다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도 있었지만) 수업은 당연히 영어로 진행되었다. 고급영작문의 경우에는 한 학기 동안 문학을 주제로 3-5쪽 분량의 페이퍼를 13-4번 낸 것으로 기억한다. 술 먹고 놀다 들어와서는 다음날 제출하기 위해 새벽에 술 취해서 쓴 기억을 포함해 아무튼 이 때 밤새기를 정말 밥먹듯이 했다. 뿐만 아니라 학기 말에는 저널(일기)도 써서 제출해야 했다. 물론 선생님은 모든 제출물을 읽고 논평을 해주셨다. 특히 페이퍼의 경우는 초고를 내면 수정해서 돌려주고, 두번째도 역시 일일히 수정하여 돌려주셨다. 빨간펜으로는 틀린 문법을 교정해주시고, 파란펜으로는 내용에 대한 코멘트를 달아주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면담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해 주시기도 했다. 


당시 나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철학적 개념(실존주의, 절망... 등등)을 마구 남발하며 헤밍웨이의 단편 등에 문학비평을 쓰고는 했다. 설명을 달지 않은 까닭은 물론 잘 몰랐기 때문이다. 잘 모르면서도 철학으로 폼은 잡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이런 나에게 '왜' 그런지 설명하라는 지적을 하셨다. 그리고 불분명한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쓰라고도 지적을 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항상 '왜' 그런지 설명을 하려고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왜'에 너무 강박이 되는 바람에 'because'라는 말을 남발하여 학기 말쯤에는 내 글이 "하늘은 파랗다. 왜냐하면..."이라는 식으로 필요 없는데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지만, 영국에서 어느 교수로부터 영국사람들보다 더 영국적으로 쓴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 생긴 습관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선생님은 매 학기 가르친 학생들의 사진을 기념으로 찍어 두시고는 하였는데, 당시 우리 반 학생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선생님이 사진 찍을 때 포즈만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사진을 다 찍고 나자, 다른 반 학생들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고 실망을 표시했던 기억이 난다. 그제서야 몇 학생이 같이 찍자고 그랬지만 이미 삐져버리신 선생님은 같이 사진 찍기를 거부하셨었다. 나를 포함해서 참으로 철없는 학생들이었고, 그게 나한테는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아, 이 때부터 이미 나는 나쁜 학생이었던 것이다. 


다음 학기에도 나는 힘들어도 배울 것이 많다고 판단하여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논문작성법>을 신청하였다. <논문작성법>에서 나는 참고문헌 찾기, 참고문헌과 각주 작성, 메모카드 작성... 등 논문작성의 전과정을 배웠다. 나는 지금 사회학 과목을 듣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이 내용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당시 키스터 신부님이 가르치시던 <영문학 형태론>이라는 과목도 듣고 있었는데, 과제로 영시를 써서 내야 했다. 내가 쓴 영시가 형편 없는 점수를 받자, 나는 등단한 시인이신 아버지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내는 꼼수를 부렸다. 그러나, 이 또한 기대했던 만큼의 점수를 받지 못했다. 아무리 번역이란 공을 들였어도 어떻든 내 글을 내지 않았으므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마땅하나, 나는 당시에 좋지 못한 점수를 받은 까닭이 박사도 아직 못 받고 문학이 뭔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시간강사가 채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도 좋은 까닭은 단지 그 시가 원래 프로가 쓴 것이라서가 아니라 장영희 선생님께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장영희 선생님께 제출한 다른 과제에 이 시가 나도 모르게 잘못 끼어들어갔는데, 선생님은 과제도 아니었지만 그 시의 멋진 글귀에 nice!라는 평을 달아주셨던 것이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내 친한 친구가 방황하면서 이 과목에 계속 들어오지 않았을 때, 선생님께 나한테 하신 말씀이다. 왜 그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오라고 하지 않냐고. 서강대는 학점의 2배 (2학점인 경우 4시간)를 초과해서 결석하면 F를 준다. 내 친구는 F를 이미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때 선생님은 아마 F를 바로 주지 않고 기다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와 친한 내게 연락해서 다시 들어오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 때 수업시간에 나를 훈계하시면서 하신 말씀, "What are friends for?" 친구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친구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말씀으로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쁜 학생일 뿐 아니라 나쁜 친구이기도 했던 셈이었다. 물론 나는 그 친구에게 계속 학교에 나오라고 연락하고, 그럼에도 그 친구는 학교에 안나왔었던 것이긴 했지만, 그 친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집에 한번 찾아가 보지도 않고 결국에는 손을 놓았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에 대해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물론 이 과목에서도 선생님은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셨다는 것이다. 이 때는 물론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과 사진 같이 찍자고 하였다. 그러나 1학기 때 이미 지적을 받아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 같아서 여전히 속이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다. 



<20세기 미국소설>은 내가 장영희 선생님께 한국어로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이다.  당시 다뤘던 텍스트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윌라 캐더의 <나의 안토니아>였다. 중간고사를 보는데 마지막에 기찬 문제가 나왔다. 이 책이 왼쪽면에서 끝나는지 오른쪽 면에서 끝나는지 맞추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영문으로 다 읽지 않고 번역본에 의지하는 학생들(그래서 영어영문학과가 아니라 '국어영문학과'라는 농담도 있었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로 국어로 영문학을 읽었던 나는 시험직전에 원서의 마지막 부분을 운좋게 펼춰봤던 덕에 그 문제를 맞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수업시간에 제임스 딘 주연의 <에덴의 동쪽>과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우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를 비디오로 시청했던 기억도 나는데, 당시에는 너무나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나중에 좀 더 나이가 들고서야 영국에서 다시 한번 TV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 때서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었다. 하지만 나의 텀페이퍼는 <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것이었다. 개츠비가 미국의 실용주의적 가치관의 폐해를 지적하는 소설이라고 해석하는, 다소 야심찬 내용의 논문이었는데, 선생님은 나의 이런 도발적인 해석에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나는 장영희 선생님께 A를 받아 본 적이 없다. 항상 B+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어떤 정도의 점수인지 나는 모르겠다. 당시 서강대 기준으로는 나쁜 점수는 아니었겠지만). 나중에 나는 이 페이퍼를 고쳐서 졸업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당연히 장영희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하고 싶었지만, 당시 그 분은 영문과 교수가 아니라 교양과정부 교수였다. 그리하여 다른 교수에게 논문을 낼 수 밖에 없었다(그 분은 넉넉하게 A학점을 주셨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나서도 학교를 계속 다녔기 때문에 나와 장영희 선생님이 만날 기회가 한번 더 있었다. 1996년 말에 사회학과 대학원을 중퇴하고 영국의 석사과정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던 것이다. 추천서를 써달라면 귀찮아서 학생들더러 써오라는 교수들도 많은데, 당시 나는 운좋게도 그런 분이 한 분도 없었다. 장영희 선생님께서도 직접 그 유려한 영 문장으로 매우 후한 내용의 추천서를 써주셨다. 나는 이 추천서에서도 몇 가지 영어 표현들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내가 장영희 선생님과 교류한 것은 1999년 초가 마지막이다. 사회학 석사과정을 끝마치고 1998년 12월 나는 잠시 한국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기억에는 안나지만 당시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때도 나는 선생님께 인사를 제대로 못드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영국에 돌아가고 나서 이메일을 드린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선생님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에게 그 내용을 소개하셨다는 답장을 보내셨다(안타깝게도 그 메일은 내게 남아 있지 않다). 열심히 영작문 공부해서 나처럼 되라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내 영어실력은 선생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게으르고 악한 학생은 그 이후로 선생님을 찾아 뵙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먼 발치에서 한번 보았던 것 빼고는. 이제는 후회하고 상심해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1999.1.30 장영희 선생님께 보냈던 편지

by pepe | 2009/05/10 04:05 | 실험실외부 | 트랙백(5)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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